[K리그 유나이티드] 꼴지여도 외롭지 않다. 서울 이랜드 팬의 한 해 생활
"팬이 없는 축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어떤 팬들은 멀리 있는 팀을 응원하는 데 큰 즐거움을 느낀다. 이 기사는 K리그2 2019시즌 내내 최하위를 달린 서울 이랜드 팬을 다룬 기사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디에서나 KTX를 타고 마지막 순간은 가슴 아프게 한다. 우리는 피치에서 일어난 걸 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하겠다.
나는 어떻게 팬이 됐는가
나는 2017년 여름 서울에 와서 몇몇 축구팀들을 봤다. 인천 유나이티드 경기에선 성남 경기를 봤고, 나는 심지어 유감스럽게도 FC 서울 홈 석에 앉았다. 하지만 내가 서울 이랜드에 사로잡힌 것은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이었다. 나는 표범 무늬가 새겨진 로얄블루 셔츠를 본 적이 없다. 역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경기장. 나는 곧바로 서울 이랜드에 빠졌다.
2년 반이 빠르게 지나면서 선수들은 피치에서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 클럽은 영원히 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성적이나 리그 순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서울 이랜드의 팬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시즌 시작 전, 나는 준비해야 했다. 나는 팀 로고를 가운데에, 팀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하얀색이 있고 상단과 하단에 각각 '맨체스터 레오파드'라 쓰여진 깃발에 돈을 썼다. 나는 서울 이랜드를 위한 유럽식 깃발을 만들고 싶었고 영국식 축구 문화를 팬층에 주입하고 싶었다.
막이 올라갔다. 그리고...
리그는 3월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 클럽에는 불확실성이 있었다. 비수기에 많은 선수들이 떠나갔지만, 우리 선수단의 뎁스를 위해 많은 선수들과 계약했다. 시즌 대부분을 차지하는 길고 긴 천안 경기 이전 1,2차전은 잠실에서 치뤄질 예정이었다.
한국에서 3월은 인사이동의 달이다. 선생님들이 오고간다. 나는 새로 온 동료교사들을 데려와 진정한 축구를 보여주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했다. 첫 경기는 난타당한 광주전이었다. 동료교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첫 승점은 안산전에 얻어냈다. 하지만 안산 그리너스가 마지막 동점골을 넣으면서 레오파드로부터 승리를 뺴앗았다.
첫 원정 경기는 성 패트릭 데이에 열렸고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매우 무거웠던 토요일 저녁, 나와 안토니오(동료이자 자랑스러운 멕시코인 서울 이랜드 팬)는 서울역에서 만났다. 우리는 대전으로 가는 1시간짜리 KTX 여정을 했다. 그 후 첫 교착상태가 이어졌지만, 나는 내 새로운 '맨체스터 레오파드' 깃발 바로 옆에 아일랜드 국기를 TV에 보이게 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짧은 A매치 휴식기 후 첫 주중에 FA컵 경기가 있었다. 내 생일 이틀 전, 나는 오후 6시에 학교에서 떠나 서울역으로 갔다. 북쪽 도봉구에서 서쪽 부천으로 갔다. 이 날은 더글라스 쿠티뉴의 데뷔전이었고, 3-1로 이겼다. 쿠티뉴는 얼마나 훌륭한 데뷔전을 치뤘는가! 이것이 올해 서울 이랜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연장전이었고 아마도 내가 직관했던 최고의 경기들 중 하나였다.
3일 후, 그리고 다사다난했던 생일 밤 이후, 우리는 다시 아침 일찍 KTX를 탔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상한 것이었다. 홈 팀은 우리의 새로운 지역 라이벌 아산 무궁화였다. 서울에서 천안까진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게 더비인가? 내가 기억하기론 그 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우리는 동장군의 마지막 포효로부터 라면으로 몸을 뎁히며 입구에 서있었다.
천안 홈 경기
2019년 4월 6일, 우리가 한동안 두려워하던 그 날이 마침내 우리를 덮쳤다. 바로 임시 홈 구장 첫 경기였다. 구단은 팬들이 경기를 보러 갈 수 있도록 무료 셔틀버스를 대줬다. 2시간을 왔다갔다하며 나는 버스 탑승을 두번이나 했다. 절대 다신 하기 싫다. 이 날은 내가 직관을 못했던 2019시즌 첫 번째 경기였다. 우리 팀은 다음주에도 천안종합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뤘다. 휴가도, 일 약속도 나를 막진 못했다. 나는 전날 밤 식중독을 일으켰고 서울 이랜드가 안양을 터는 모습을 보며 누워있었다. 나는 정말로 내가 불운한 게 매력 요소라 생각한다. 내 생각엔 그 버스 여정을 하는 것보단 아마 아픈게 나을 것이다.
며칠 후 서울 이랜드는 FA컵 경기를 치뤘다. 팬들을 위해 호남대학교와 경기가 치뤄지는 경기장으로 태워다주는 버스를 대줬다. 나 역시 주중 오후 2시가 아니었다면 갔을 것이다. 나는 쉬는시간에 휴대폰으로 경기를 본 걸 기억한다. 마침내 우리는 또 한 번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우리는 3개월 반 이상 승리가 없었다.
전남 경기는 월요일 밤이었고 이랜드가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나도 그 날 저녁 K리그 유나이티드 팟캐스트에 초대받았다. 그래서 내 눈은 전남전, 내 귀는 팟캐스트를 향했다. 올 시즌 내가 직관을 못한 경기는 경기 시간과 선약이 겹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 경기는 눈에 띄었다. 나에겐 영국에서 온 친구가 있었고, 이태원에 있는 울프하운드 펍을 '점령'했다고 했다. 내 믿음직한 깃발을 벽에 걸었다. 우리는 앉아서 부산 아이파크에 4-1로 지는 걸 지켜보았다.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하다...
앞으로 2주 동안 무승을 기록하는 천안과 수원 경기를 다녀온 후, 올해 우리는 결코 다시 승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음 경기는 FA컵 대전 코레일 전이었다. 걔넨 이겨야지, 걔넨 이겨야지... 하지만 이랜드는 2-0으로 졌다. 매우 슬픈 마이클은 집에서 코타지 파이를 먹으며 그 경기를 봤다. 파이는 경기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이번 시즌 39경기 중 30경기를 직관했지만, 이 기간동안 나는 어느 경기를 봐도 이기지 못할 것만 같았다. 5월과 6월 내내 6경기 중 4경기를 주중에 치뤘다. 정상적인 시즌이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시간 이내에 서울 북부에서 천안까지 간다는 건...
팬들의 첫 번째 보복은 6월 말에 이루어졌다. 이번엔 부천 원정이었다. 월요일 밤이었지만, 서울과 가까웠다. 하지만 3-2로 또 졌다. 팬들은 의견을 알리고, 우리의 기분을 구단에 알릴 때가 되었다. 나는 항상 이 경기를 기억한다. 그 후,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비록 우리는 졌지만 팬들 사이의 우정은 강해져갔다.
그 주 주말 우리는 안산에 가야 했지만, 나는 아침에 결혼식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구두와 양복을 입고 경기장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 시즌은 내가 처음으로 경기를 보면서 울었었다. 나는 보통 팀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과 생각을 최소한으로 유지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나는 마치 내가 제단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첫 번째 중요한 원정경기
다음 주는 첫 번째로 중요한 원정 경기였다. 토요일 아침 일찍, 나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를 탔다. 안토니오가 미리 내려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혼자 갔다. 나는 호스텔보다는 호텔에 묵기로 했다. 호텔은 바로 해운대 해변에 위치했다. 이것은 나에게 완벽한 원정이었다. 대학 시절 유럽 맨유 원정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경기 몇 시간 전에 바다에서 수영을 해본 적이 없다. 이곳은 천국이었다.
나는 이게 가장 좋아하는 원정 경험이었다고 말해야겠다. 나는 그 전 주 눈물이 젖은 눈을 떠올리며 기뻐라는 그라운드에서 자주 보는 사람들과 만났다. 건배하자구 친구들. 부산은 대단했고 또 나는 부산에 있는 동안 나와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던 두 명의 청년들인 K리그 유나이티드 부산 아이파크 담당 기자 톰과 토드를 만났다. 주말엔 해변가에서 아름다운 스페인 빠예야로 마무리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열차 탑승을 앞두고 여름 햇볕을 흠뻑 적셨다. 왜 우리는 부산에서 매주 놀지 못할까?
멀리서 지켜보며...
다음 두 경기 모두 패배로 끝났다. 나는 우려하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올해 서울 이랜드가 다른 경기 또한 이기지 못할 것이라 믿기 시작했다. 그 때, 뭔가 마법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7월 말 일요일 저녁, 서울 이랜드가 전남 원정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 때 난 어디 있었냐고? 나는 베트남 하노이에 있었다. 난 휴가를 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에 내가 말했듯이, 나는 운이 나쁜게 매력이다. 나는 레스토랑에 앉아 와이파이로 경기를 봤던 기억이 난다. 베트남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또 일반적으로 내가 보고 있었던 경기에 관심이 있었다. 원기종이 골을 넣었을 때 나는 길에서 서울 이랜드 셔츠를 입고 손에 깃발을 쥐었다.
우선 버텨야 했다. 경기 마지막 10분 동안 하노이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은 나였음이 틀림없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겼다. 15경기 만에 첫 승을 거두며 우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깃발을 흔들며 하노이 거리를 달렸다. K리그 공식사진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찍었다. 이것은 단지 가끔, 몇몇 사람들을 위한 단순한 경기 그 이상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울었을 땐, 아무도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신성한 필드 뒤에...
서울 이랜드에게는 4연승의 서막이었던 마법의 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8월, 우리는 서울에 돌아왔다. 경기전 서울 이랜드 팬들을 모두 모아놓고 술집에서 만났다. 나는 우리 함께 부대처럼, 팀처럼 가길 원했다. 15명이 잠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부천 경기를 기억한다. FC 서울 팬인 내 친구 이안과 직관했다. 이안은 올해 이랜드의 상황을 보고 싶어했고, 1-0으로 이긴 후 매우 감명받았다.
우리는 새 노래와 기존 노래를 모두 외치면서 큰 목소리를 냈다. '사랑의 서울 이랜드' 구호는 인기있는 구호였다. 그 다음 두 경기도 똑같았다. 잠실에 돌아와 이겼고, 이를 반복했다. 우리는 다시 진정한 축구팀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의욕이 높았다. 잠실 마지막 두 경기는 안산 그리너스와 부산 아이파크였다. 나는 이 기간동안 스페인 가족 휴가를 갔지만 부산 직관을 위해 돌아오길 바랬다.
서울이 안산에게 졌다는 걸 알게 된 지 거의 20시간이 지나서야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햇빛이 쨍쨍한 스페인 휴가 시작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도 일주일만 지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부산전 시작에 맞춰 서울에 도착한 다음, 라이언 편집장 생일에 나갈 계획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모든 걸 계획했고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문제는 도하 경유 비행이었다. 4시간 지연이라니. 나는 가슴이 아팠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려 했다. 비행기가 도착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마침내 휴대폰을 다시 켰을 때, 이랜드는 3-0으로 지고 있었다.
나는 의문점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날 밤 잠실에서 역전과 같은 뭔가 마법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땐 3-1이었다. 가방을 챙겼을 땐 3-2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후 3번째 골을 기록하며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도봉구로 돌아가는 조용하고 어두운 리무진 버스에서 쿠티뉴가 동점골을 기록하자 25세 맨체스터인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모두 돌아서서 나를 봤지만 난 정말로 상관하지 않았다. 이 경기는 서울 이랜드 올해의 명경기였다.
쉽지 않은 추석
그 경기 후 또 다른 A매치 휴식이 있었고 2주 동안 서울 이랜드 경기가 없었다. 이 시기는 추석이라 일본으로 휴가를 갔다. 나는 실제로 한국에서 일을 하고, 적당한 시기에 비행기 값이 싼 곳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 도하 사건은 없었고, 금요일 귀국 비행기를 예약했다. 이는 토요일 대전 경기에 맞춰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차를 타고 대전에 내려갔다. 거기까지 2시간 반 갈 걸 4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추석 교통 체증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대전은 삼키기 힘든 약이었다. 그 경기로 인해 대전이 우리와 같은 승점을 기록하게 됐고, 우리의 경기 방식으론 우린 대전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하지만 사흘 후 나는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 부탁해 일찍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5시 15분 겨우 수업을 마치고 다시 한 번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일단 천안에 도착하니 상황이 더 나빠졌다.
택시 승차장으로 갔지만 줄이 길었고 택시도 없었다. 10분이 지났고 나는 대기열 앞까지 다다랐다. 내 차례가 왔다. 택시가 왔는데, 갑자기 운전사가 내렸다. 이제 내 한국어 실력은 기껏해야 기본 수준이지만, 그는 옆 동네에 가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택시에 탔고 목적지를 계속 반복해 말했다. 그는 마지못해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음, 나는 마지못해 말하는 거지만, 운전사는 요금을 20% 더 비싸게 후려쳤고, 같은 도시에서의 7분 동안의 여정 동안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비 오는 안양에서도 직관할 수 있나?
그 해 가장 큰 패배는 다음 경기에서 나왔다. 복수를 노리는 안양이었다. 이 경기는 잘못된 이유로 기억되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안토니오는 요리 솜씨를 증명해보이고 싶었고, 나를 집에 초대해 직접 만든 프라이드 치킨을 대접했다. 정말 좋았다. 그리고 택시에 타 경기장으로 갔다. 그 날은 비가 내렸고 미끄러운 계단에서 넘어졌던 기억이 난다. 몇 주 동안 등에 멍이 들었다.
올해 양 측 사이에서 약간의 나쁜 기류가 흘렀고 보안요원은 실제로 구호를 외치고 드럼을 치는 우리에게 매우 엄격했다. 한 팬이 '북을 치지 말아라'라 적힌 K리그 규정집을 보자고 요청하자 그는 재빨리 보복했다. 난 차라리 그 날을 잊고 싶었다.
비행기, 기차, 그리고 차
우리는 시즌 중 이 시점부터 팬으로서 약간 멍들고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안양에서 푸대접을 받고, 꼴찌였고, 한국 축구 팬들의 농담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하고 충실한 지지자들과 함꼐였다. 나와 안토니오, 그리고 친구 대니보이와 함께 주말에 광주에 내려왔다. 대니보이는 전날 밤 기차로 내려갔지만, 나와 안토니오는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서 만났다. 일단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게스트하우스로 곧장 가는 지하철을 탔다.
우리는 가까스로 온라인에서 전화번호를 찾았고, 내 한국어 실력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어쩧게 간신히 호스텔에 들어갔는진 아직도 알 수 없지만, 키패드를 눌렀고 효과가 있길 바랬다. 숙소 문제는 해결됐고 이제 대니 보이를 찾을 때가 됐다. 우리는 삼겹살 식당 옆에 있는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결정은 큰 경기에 앞서서 우리 스스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택시를 세우는 데 5분도 지나지 않았고 우리는 대니보이를 찾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머리카락 좀 봐. 30달러를 썼는데 백발이 눈에 보이지 않아!" 였다.
우리는 경기장에 도착했고, 그 전 주에 비해 보안요원은 그 이상으로 원정에 협조적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광주 팬들은 광주보다는 서울 이랜드 선수들의 사인을 받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너희들이 봤다면 아마 '양 팀이 승격 다툼을 하고 있나'고 생각할 것이다. 광주에서 저녁은 별 일 없었고, 우리는 그 날부터 너무 피곤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케밥에 마음이 갔다. 케밥 가게를 찾아 광주를 한 시간이나 돌아다녔음에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귀국길도 공항에서 3시간이나 지연되었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으리라 생각한다.
삼키기 쓴 약
11월 초 토요일 부천 Vs 서울 이랜드 경기는 가슴아픈 경기였다. 나는 그 날 노원에서 출발하기로 결심했는데, 왜냐하면 지하철 갈아탈 일이 없을 것이고 경기 시작 전 지하철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구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리드를 잡은 부천이 2-1로 승리했다. 내가 여기서 결과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알고 있지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80분 서울 이랜드가 동점골을 터트렸지만 추가시간에 야속하게도 심판은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부천은 역전골을 넣었고 이랜드는 2년 연속 10위를 확정지었다.
거짓말 안하고, 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 팀이 올해 뭔갈 할 수 있을거라 믿었지만, 나는 원정석에 홀로 남겨졌다. 나는 혼자 앉아 있었고, 모든 이랜드 팬들은 경기가 끝나고 나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10분 더 경기장에 있었다. 나에겐 매우 힘든 일이었다. 보안요원은 나에게 떠나라고 하지 않았다. 팬들이 방금 겪은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날은 또한 맨유의 패배, 영국이 럭비 월드컵 결승전에서 진 걸 본 날이었다. 나는 운이 내 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마지막 환호소리
이제 한 경기 남았다.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경기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이 간 사람들은 나, 대니보이, 안토니오, 그리고 K리그 유나이티드 기자들이었다. 이 경기는 서울 이랜드가 이기고 있던 경기였지만, 후반전엔 부산이 우세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울 이랜드의 구호와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경기 내내 포옹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길고 힘든 시즌이 끝났고, 우리는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김민균이 추가시간에 골을 넣어 5-3을 만들었지만, 나는 서울 이랜드가 골을 많이 넣은 걸 그리 기뻐하진 않았다. 이기든, 지든, 비기든, 우리는 서울 이랜드라는 생각을 굳혔다. 경기가 끝난 후, 우리는 경기장에서 선수들과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선수들의 눈에서 슬픔과 실망을 볼 수 있었다. 그 날 우리는 많은 사과를 받았다. 그 추운 11월 저녁 우리가 잠실 올림픽 경기장을 걸었을 때,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여전히 최고였다.
이게 내가 서울 이랜드를 좋아하는 이유
하지만 이기던, 지던, 비기던, 그게 축구 클럽을 응원하는 전부 아닌가? 그래, 서울 이랜드는 다른 어떤 팀보다 더 많은 패배를 했지만, 그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저 서울 이랜드 때문에, 나는 많은 도시를 갔다왔고, 수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여기 한국에 있는 동안 정체성을 발견했다. 때때로, 트로피나 승점 3점보다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 2020년이 서울 이랜드에게 어떤 해가 될 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3월이 되면 다시 이 모든 걸 반복할 것이다. SEFC!
http://www.kleagueunited.com/2019/12/not-so-lonely-at-bottom-year-in-life-of.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