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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체육으로 대한 독립을 외치다. 한국 축구와 스포츠계의 대부, 몽양 여운형 선생

by 뚜따전 202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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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이 학창 시절에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해방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 부분을 관심 있게 봤다면 '여운형' 이름 석 자를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만약 여운형 선생을 안다면 민족과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 대부분이 여운형 선생이 단순히 독립운동가 활동만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의 대부이자 스포츠와 깊은 관계를 맺은 체육인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한국 스포츠계의 기틀을 다진 대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운 여운형 선생은 중국 유학 중이었던 1914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해 운동 실력을 발휘하였다. 야구와 육상 선수로 활동하며 교내외에 이름을 떨치고 실력을 인정받은 여운형 선생은 푸단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체육을 지도한 것뿐만 아니라 야구선수로 활약했다. 여운형 선생은 상해 복단대학의 학생들을 모아 남양원정축구단을 구성하며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필리핀체육회와 필리핀 화상총회의 초청 형식으로 필리핀을 순방했는데 싱가포르에선 영국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다 추방됐고 필리핀에서는 <필리핀 프리 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세아 민족 해방을 위해 먼저 아세아 민족이 단결하고 다음으로 구미 제국주의를 아세아 전역에서 구축해야 한다. 아세아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남방 제 민족이 연방공화국을 조직해야 할 터인데, 제일 먼저 필리핀이 독립해야 한다”라고 발언하며 미국과 일본의 식민 정책을 비판했고 투쟁, 민족 해방을 촉구하는 '혁명자 대회' 개최를 시도한 게 현지 신문에 보도됐다.

이 사건으로 아세아 각국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과 반제 연대투쟁을 선동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한다는 이유로 여권을 압수당하고 중국 기독교 청년회관에 억류당하였으나 중국 영사관, 화상 총회, 법조계와 신문 기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한 결과 경찰의 사과문 작성과 손해 배상금을 받고 풀려난 여운형 선생은 상하이에 돌아왔다. 몇 개월 후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1929년 7월 상하이 대마로 경마장에서 열린 규슈제국대학과 상해구락부의 야구 경기를 관전하러 갔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다. 체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좋아하는 야구 경기를 관람했을 정도면 평소 여운형 선생이 얼마나 스포츠를 좋아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석방된 후 1933년 사장으로 취임한 조선중앙일보에 최초로 스포츠란을 만들며 변함없는 스포츠 사랑을 보인 여운형 선생은 그해 3월 조선연무관 고문을 시작으로 1933년 5월 조선체육회 이사를 맡아 체육단체 임원으로 한국 체육계에 본격적으로 첫 발을 내디딘 몽양 여운형 선생은 조선축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서울육상경기연맹 회장, 동양권투회장, 조선체육회장,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고려탁구연맹회장, 조선유도유단자회, 스포츠여성구락부 고문을 지내며 한국 체육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여기에 각종 경기 대회 개최는 물론 체육 강연을 펼치며 조선의 체육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언론사 사장으로서 사회적인 위치도 있지만, 평소 여운형 선생이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934년 서울을 방문한 영국 함대 소속 축구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보성전문학교 선수들이 찍힌 기념사진. 오른쪽 상단에 넥타이를 맨 사람이 여운형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 대한체육회 체육 포털

체육인 몽양 여운형 선생을 이야기할 때 여운형 선생이 한국 축구계의 발전에도 큰 기틀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빼고 이야기하면 섭섭하다. 야구뿐만 아니라 축구에도 능했던 여운형 선생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일하던 당시 조선축구협회 초대 회장 학범(學凡) 박승빈의 후임으로 (여운형 선생의 취임 당시 조선중앙일보가 신문 지면을 기존 4면에서 8면까지 늘리고 주식회사 체제를 갖추는 등 안정적인 경영으로 사세를 확대하던 시기였다.) 제2대 조선축구협회장에 취임한 여운형 선생은 1934년 10월 조선을 찾은 영국, 프랑스 함대 선원과 국내 축구팀 간 친선 경기를 주최하고 1936년 4월 전국 10개 팀이 참가하는 도시대항축구대회를 개최하는 등 조선 내 축구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또한 여운형 선생은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 관전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전반적인 축구 경기 양상과 함께 한국 축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한 것이 눈에 띈다.

전반에 경대가 보여준 열각적이고 능동적인 공격은 참으로 배울만했다. 전원이 항상 다음 순간을 생각하여 움직이며 찬스를 보면 맹호같이 내달린다. 수비에 있어서 津田(진전)의 과감함과, 정확함은 일찍 조선에서 못 보던 놀라운 존재이다. 경성의 숫은 거의 다 津田을 유명케하는 호*(*는 읽을 수 없는 글자.) 이었다. 조선 축구도 과학적으로 나가야 한다.

- 1938년 8월 11일 일본 게이오 대학과 경성 선발군 간 축구 경기(2-2 무)을 보고 <동아일보>에 기고한 평

조선축구협회 회장으로서 조선의 축구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은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중앙일보 사옥은 당대 축구인들이 누구나 편히 찾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실제로 신문 편집이 끝나는 5시부터 조선중앙일보 사장실은 체육관으로 변모했고, 모든 사원들이 교대로 운동을 즐길 정도로 조선중앙일보는 체육 활동에 우호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일제가 침략 전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며 체육 활동보다 군사 활동이 우선이 됐다. 여운형 선생은 결국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5월 조선축구협회장직을 내려놓는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고원훈이 차기 조선축구협회장을 맡으며 조직은 존속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가기는 힘들었다. 결국 1942년 2월 22일 자진 해산한 협회는 해방 후인 1945년 12월에야 겨우 다시 조직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축구의 국제 무대 데뷔전, 1948 런던 올림픽. © 엑스포츠뉴스

후술할 대한민국의 국제올림픽위원회 가입으로 올림픽 참가가 가능해지자 대한민국 축구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축구 대표팀을 꾸려 런던 올림픽에 참여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란 이름 아래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도전장을 내민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독립 후 정부 수립도 되기 전이었던 이 시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런던 올림픽에 참가해 한국 축구의 첫 국제 경기였던 1라운드에서 멕시코를 5-3으로 잡는 이변을 일으키며 첫 대회에서 8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비록 대회 우승 팀 스웨덴에게 8강에서 0-12로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지만(이때 기록했던 1승과 8강 기록은 각각 1996년과 2004년에 가서야 경신이 될 만큼 오래 남았던 기록이다.) 스웨덴은 런던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었고 당시 AC 밀란에서 전설의 ‘그레-놀-리(Gre-No-Li)’ 삼총사 구성원이었던 닐스 리드홀름과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이 스웨덴의 핵심 선수로 대표팀을 이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이전임에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선전을 한 점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런던 올림픽을 시작으로 1954 스위스 월드컵부터 2002 한일 월드컵 4강, 2010년 원정 첫 16강과 2018년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카잔의 기적까지. 한국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이도 제2대 축구협회장 여운형이었다.


1933년 출간된 &lt;현대철봉운동법&gt;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상의를 벗고 포즈를 취한 사진. © 경향신문

뿐만 아니라 몽양 여운형 선생은 생활체육의 보급과 함께 엘리트 체육의 편중과 승리 지상주의에 따른 성적 우선인 체육계의 각성, 과학적인 체육 지도와 체육 조직의 필요성 등 당시 조선 체육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조선축구협회 회장이던 1935년 2월 중국 상하이로 원정을 떠나는 평양축구단 환송 기념 강연회에서 “운동으로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만들고, 경기를 통해 투쟁심을 길러야 한다"라고 열변을 토하며 민중 개개인의 건강한 몸에 기초한 실력양성 필요성을 강조했고 스포츠를 통해 청년의 투지를 살려 이를 독립운동과 연결시키려 했다. “경기는 남보다 이기려는, 즉 투쟁심을 양성하여 냅니다. ‘남에게 져라. 때리거든 맞아라. 남을 때리지 말아라’ 하는 이런 놈의 철학이 어대 다시 있겠소. 오직 망칠 조선만 있는 철학입니다.”라는 그의 발언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 재건과 민족운동을 위해 체육과 스포츠를 민족 운동과 어떻게 잘 연결했는지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시로 여운형 선생은 1933년 평소 친분이 있던 서상천(조선역도연맹 초대 회장이자 前 대한씨름협회 회장. 1950년 6·25 전쟁 때 비서 이정승, 청년단체 간부 황학봉과 함께 납북되었다.)이 출판한 <현대철봉운동법>에서 다음과 같이 운동의 효능을 설명하며 민중들에게 운동을 권했다.

내 일찍이 유년 시기에 체질이 심히 약하고 또 다병하다가 거금 34년 전(1899) 처음으로 경성에 왔을 때 각 병영에서 군인들이 철봉운동에 힘쓰는 것을 보고 나 역시 유희삼아 나의 처소에 철봉을 가설하고 조석으로 운동을 계속하였던바 의외의 효과를 얻게 돼야 약간의 잔병이 다 없어지고 신체도 강장한 이 쾌태로 되어졌다.

<현대철봉운동법>

<현대철봉운동법>을 출간할 당시 여운형 선생은 40대 후반으로 한국 스포츠계의 거물로 체면을 차린다는 이유를 대며 상의를 탈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허나 여운형 선생은 철봉 운동을 민중에 보급하고 정착시킨다는 이유 하나로 과감하게 상의를 탈의하고 현대 철봉 운동법이 담긴 책의 모델이 되어 철봉 운동으로 다져진 튼튼한 근육을 보여주었다.

물론 단순히 한국의 체육 발전의 기틀만 다진 것이 아니라 체육을 통한 민족 운동도 활발히 했다. 조선축구협회 회장 시절 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 대표팀 선발에 한국인 선수를 차별하는 부당한 처사에 정면으로 맞서 항의를 한 적이 있다.

베를린 올림픽 개막 이전 일본축구협회는 대표팀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전일본종합축구선수권대회와 명치신궁경기대회 성적을 토대로 명단을 꾸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1935년 전경성축구단이 두 대회를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원칙대로라면 조선인 축구 선수들 상당수가 명단을 차지하게 되는 상황. 조선인을 대거 발탁할 생각이 없었던 일본은 방침을 깨고 일본인 축구 선수들을 위주로 명단을 꾸렸다. 일본축구협회는 마지못해 정원 25명 중 김용식과 김영근 등 2명의 조선 선수만을 선발했다. 이 둘은 일본이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명단에 발탁했을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그 후 최종 선발에서 김영근은 자진해서 하차하고 김용식 단 한 명만이 선발로 발탁됐다. 이처럼 당초 방침과는 달리 조선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보다 우수한 조선 선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수들만으로 구성한 것은 일본인들의 얄팍한 속셈을 드러낸 처사로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일본 후생성에서는 조선의 체육 지도자 이상백, 홍성하를 초치하여 협의했으나 원만한 타결을 보지 못했었다. 약속을 무시하고 명단 25명 중 겨우 조선 선수 2명을 발탁한 사실에 부당함을 지적한 여운형 선생은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이를 시정치 않으면 두 명의 선수도 보내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그러나 일본축구협회는 이를 묵살하기에 이르렀고, 여운형 회장은 김영근과 김용식 선수에게 일제의 부당성과 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뜻에서 하차할 것을 종용했었을 정도로 일제의 불의에 참지 않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출전을 권한 것도 여운형 선생이었다.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해야 했던 손기정 선수는 올림픽 출전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손기정 선수에게 여운형 선생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양 어깨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라고 말하며 손기정 선수의 참여를 독려했다. 여운형 선생의 설득 덕분에 손기정 선수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할 수 있었다.

1936년 8월 13일 조선중앙일보의 4면.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우승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삭제했다. © 위키피디아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하자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 선생은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들은 후 감격해서 즉시 호외를 발행하라고 지시했고 '붓대가 꺾여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의 주의를 들을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며 13일자 신문에 손기정 선수의 가슴의 일장기를 덧칠해서 지우고 보도했다. 같은 날 발행한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의 일장기 말소와 함께 일장기 말소사건을 알리는 서막이었다.(8월 13일 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 서울판이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는 채백 부산대 신문방송학과의 발언에 근거한다.) 당시 보도 내용을 보면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을 받은 손 선수”라고 되어 있다.

당시 신문의 사진 화질 등 상태가 좋지 않아서 조선총독부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가 지워져 있던 것을 몰랐고 검열에서 통과했다. 이어서 동아일보가 8월 25일 자 신문에 손기정 선수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는데 이때 일장기 말소사건이 조선총독부에 알려지게 된다. 동아일보의 보도로 경기도 경찰부가 일장기 말소사건의 수사에 착수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 건도 같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에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했던 유해붕 기자는 조선인으로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의 우승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여운형 사장도 “붓대가 꺾어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의 주의를 들을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며 유해붕 기자를 격려해 주었다. 이어 “일장기 말소에 대해 우월감을 가진 일은 없었으며,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일장기를 말소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로 인해 여운형은 사표를 제출하였고 조선중앙일보는 9월 4일 자진 휴간을 했으나, 결국 폐간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폐간 후 여운형 선생은 일본과 조선을 오갔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고 조선체육회의 재건을 위해 조선체육동지회를 조직했다. 조선체육동지회는 1945년 11월 12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총회를 열어 취의서와 헌장을 심의하고 만장일치로 여운형을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1946년 10월 16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조선올림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여운형은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젊은 선수가 모든 역량을 발휘하는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발언한 후 <조선올림픽의 노래>를 제정 및 발표하고 악보 3만 장을 관람객에게 나누어주었다.

1947년 4월 19일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우승 축하회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 앞으로 다가올 올림픽에서 우리 민족의 의기와 기백을 전 세계에 과시하자고 연설했다.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해서 우리 민족의 의기와 기백을 뽐내어 신생 독립 국가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대책 마련에 나섰다.

1947년 5월 9일 조선체육회 산하단체는 YMCA 체육관에서 여운형 선생을 포함해 유억겸, 전경무, 이상백, 정범환, 하경덕, 이병학, 이법용, 민원식 등을 조선올림픽위원으로 선출하고 5월 12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해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조선체육회 회장과 부회장이 겸하기로 결정하면서 당시 조선체육회 회장이었던 여운형은 조선올림픽위원회(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에 취임하게 됐다.

여운형 선생과 조선올림픽위원회의 노고 덕분에 대한민국은 1947년 6월 20일 열린 스웨덴 스톡홀름 제41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IOC 인준을 받으며 50번째 회원국이 됐고 올림픽 참가 길이 열리게 됐다. 가입 당시 대한민국은 미군정 치하로 정부 수립 전에 IOC의 인준을 받았는데, 이는 사상 최초였다. 이에 따라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 당당하게 태극기를 들고 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였던 손기정 선수가 묘목으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가려야 했던 안타까운 일이 있은 이후 11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하지만 신탁 통치로 찬탁과 반탁 간 극심한 대립 속에 여운형 선생은 대한민국이 런던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올림픽 개막 약 1년 전인 1947년 7월 19일, 대한민국의 IOC 가입 축하 기념으로 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축구 친선 경기가 열린 날 당시 조선체육회장 겸 한국올림픽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은 경기 참관 전 환복을 이유로 리무진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던 길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청년 한지근(본명 이필형, 李弼炯)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사후 공산당 가입 등 좌익 활동 전력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었지만 광복 60년인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로 재평가를 받았고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운형 선생의 체육계 활동 또한 재발굴됐다.

체육인 여운형 선생을 요약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며 헌신한 체육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였다. 일제강점기 여운형 선생은 운동선수로서, 각종 스포츠 단체의 임원으로서, 언론사 사장으로서 체육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각종 경기 대회를 개최했다. 또한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참가를 설득하며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획득의 숨은 공로자 역할을 했고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했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정부 수립 이전 조선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해 IOC에 가입하며 올림픽에 참가하는 데 큰 공을 세우는 등 한국 체육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여운형 선생은 특히 생활체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체육은 판단력, 책임감, 단결력을 양성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으며 여성 체육에서도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했다. 여운형 선생의 건강관은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서 병이 많았는데 철봉 운동을 통해 많은 효과를 보며 건강을 유지한 것에서 비롯되음을 밝혔다. 이에 국민들의 건강력 증진을 위해 철봉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봉 운동을 생활체육에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처럼 여운형 선생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대한민국과 민족을 위해 대한민국 체육 정착에 힘썼다. 당장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농구대잔치, 서울 아시안게임 및 서울올림픽 개최, 민속씨름 등이 온전히 전두환 정부가 군사 독재로 인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시행한 3S 정책 하에 만들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오직 민족과 대한을, 그리고 대한의 체육 발전을 위해 힘쓴 여운형 선생의 마음가짐이 더더욱 높이 평가받는 건 당연하다.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체육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진정한 체육인이었던 여운형 선생의 업적과 공이 축구팬뿐만 아니라 스포츠를 사랑하는 국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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