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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즈데네크 제만 인사이드: 제만란디아, 닥공의 화신, 보헤미안

by 뚜따전 2022.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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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역사는 길다. 그만큼 수많은 감독들이 축구계를 거쳐 갔고 이 중 몇몇은 축구에서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비토리오 포조부터 시작해 허버트 채프먼, 리뉘스 미헐스, 엘라니오 에레라,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아리고 사키 등이 현대 축구의 기틀을 다진 혁명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그 당시 축구계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전술과 철학이 축구 역사에서 혁신으로, 그리고 그들이 혁명가로 기록될 만한 훌륭한 성적이 뒷받침됐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앞서 언급한 혁명가와 비교하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누구도 따라하기 힘든 확고한 색깔과 신념으로 축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온 감독이 있으니, 바로 "일 보에모(Il Boemo: '보헤미안<Bohemian>'의 이탈리아어)" 즈데네크 제만이다.

카테나치오로 대표하는 신중한 성향을 드러내는 이탈리아 축구와는 정반대로 순응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색깔을 드러냈던 제만을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제만의 상징과도 같은 극단적인 공격 전술은 1-0으로 앞서더라도 여전히 득점을 내지 못한 것처럼 맹렬히 공격한다. 제만의 전술과 철학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관심에 가까운 수비에 대해 비웃었을 때, 제만은 자신의 전술의 요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0-0은 지루하고, 차라리 4-5로 지는 게 낫다. 4-5 패배는 적어도 약간의 재미라도 줄 수 있다.(A 0-0 is boring, it’s better to lose 5-4. At least it gives you some excitement.)”

이렇듯 제만은 기존의 축구관과는 반대되는 확고한 철학을 제시했고 포자 칼초를 세리에 A로 승격시킨 후에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전술과 철학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던 1990년대 이탈리아 축구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보헤미안 성향을 한결같이 드러내며 수십 년간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제만의 삶으로 들어가 보자.

제만은 1947년 프라하 병원의 주치의였던 아버지와 주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제만은 어린 시절 아이스하키, 배구, 야구, 핸드볼을 하면서 보냈다. 제만은 축구를 업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제만은 축구보다 청소년 대표팀으로 뛸 정도로 두각을 드러냈던 배구와 핸드볼을 많이 했다. 아이스하키에도 곧잘했던 제만은 훗날 아이스하키를 통해 혹독한 훈련 방식에 큰 영향을 받는다.

1968년 여름, 제만은 유벤투스와 팔레르모, 파르마에서 윙어로 뛰었던 외삼촌 체스트미르 빅팔렉과 함께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4개월을 보냈다. 그런데 제만이 시칠리아에 있는 동안 조국에선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내 정세가 불안해졌다.

모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제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프라하의 봄이 없었더라면 축구인 제만도, 제만란디아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내린 현실적인 결정이었다. 프라하의 봄 이후 이탈리아에 완전히 정착하기로 결정한 제만은 이탈리아 여권을 취득하고 시칠리아 여성과 결혼했으며 1975년 스포츠 의학을 공부해 팔레르모의 ISEF에서 스포츠 의학 논문을 제출하고 수석으로 졸업하며 피지오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피지오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동안 제만은 치니시, 바치갈루포, 카리니, 미실메리, 에사칼사 등 지역 아마추어 축구단을 잠시 도와주며 지도자 경험을 쌓는다. 27세에 팔레르모 유스에 취직하며 본격적인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한 제만은 1979년에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지도자 양성 기관인 코베르치아노에서 코칭 라이선스를 취득한다. 이 당시 코베르치아노에서 제만과 비슷한 시기에 라이선스를 취득한 축구인이 한 명 있었으니, 훗날 사키이즘으로 현대 축구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 아리고 사키다.

리카타 칼초 시절 제만. © 위키피디아

1983년, 제만은 시칠리아의 작은 클럽인 리카타 칼초의 감독이 됐다. 두 번째 시즌에서 제만은 젊은 선수들과 함께 세리에 C2의 4개 그룹 중 하나를 우승하고 세리에 C1으로 승격했다. 제만의 리키타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리카타는 34경기에서 58골을 넣었고 리그 내 다른 팀들보다 20골을 더 넣었다.(이 당시 준우승팀인 소렌토는 28골을 넣었고, 경기당 평균 0.82골을 기록했다.)

제만은 1986년 세리에 C1에 소속된 포자 칼초 감독으로 선임됐다. 포자 칼초는 훗날 즈데네크 제만이란 이름을 이탈리아 축구계에 알리게 된 팀이지만 첫 도전은 부임 첫 시즌부터 경질되며 신통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됐다. 1년 후, 제만은 AC 밀란으로 떠난 아리고 사키의 후임으로 세리에 B 파르마 감독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파르마 역시 제만을 기다려 주지 않았고 7경기 만에 해고시켰다.

1988년, 제만은 ACR 메시나 감독으로 선임되며 본인의 첫 이탈리아 거주지였던 시칠리아로 돌아왔다. 제만의 메시나는 세리에 B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었지만, 두 번째로 많은 실점을 기록하며 중위권에 머물렀다. 제만의 메시나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살바토레 스킬라치라는 스트라이커를 발굴한 것이었는데, 스킬라치는 1988-89 시즌 23골을 기록하며 세리에 B 득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훗날 제만이 잠재력 있는 어린 공격수들을 많이 발굴하고 기량을 만개시킨 것을 생각하면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부임 3년 만에 포자를 세리에 A로 승격시킨 제만은 세리에 A 승격 후에도 자신의 축구를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제만의 독특한 철학이 이탈리아 축구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 Futbolismo

1989년 포자 칼초의 회장 파스콸레 카실로는 몇 년 전 제만을 해임했던 것을 후회하며 제만과 다시 계약을 맺었다. 포자 칼초의 기적의 서막이었다. 제만이 감독직을 맡은 지 2년 만인 1990-91 시즌, 포자는 세리에 A로 승격했다. 리그 내 다득점은 기본으로, 2위 우디네세가 기록한 53골보다 14골 많은 67골을 기록했다.

세리에 B에서 제만의 적극적이고 과감한 공격 축구는 이탈리아 축구계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주었고,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을 보는 듯한 4-3-3 포메이션은 제만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다. 포자에서 제만은 주세페 시뇨리, 로베르토 람바우디, 루이지 디 비아조, 이고르 샬리모프, 이고르 콜리바노프, 호세 안토니오 챠모트, 단 페트레스쿠와 함께 포자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포자 시절 제만의 대표적 유산, 주세페 시뇨리. © 위키피디아

특히 제만의 포자 시절 괄목할 만한 성과는 당시 이제 20대 초반인 미드필더 주세페 시뇨리를 공격수로 포지션 변경을 시키며 시뇨리의 기량을 만개시켜 포자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제만은 포자 시절 시뇨리에 대해 "시뇨리는 (피아첸차에서) 미드필더로 기용됐지만 나에게 시뇨리는 스트라이커였다. 나는 시뇨리가 많은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곧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시뇨리를 공격수를 기용하기로 한 제만의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시뇨리는 처음엔 자신을 공격수로 기용하려는 제만의 생각에 당황했다. "내가 포자에 도착했을 때 제만은 '환영한다, 폭격기여'라고 말하며 나를 맞이했다. 그 순간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세리에 B에서 5골을 넣었고 세리에 C에서 3골을 넣었다. 나는 폭격기가 될 수 없었다. 제만이 분명히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뇨리를 공격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제만의 기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990-91 시즌 시뇨리는 리그 15골을 기록했고, 세리에 B에서 11골을 넣었다. 첫 만남부터 시뇨리를 폭격기라 부르며 공격수의 면모를 봤던 제만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세리에 A로 승격한 1991-92 시즌, 제만의 포자는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AC 밀란에 이어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58골을 기록했다. 제만의 포자가 어린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구축해 만든 기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흥미로운 결과였다. 당시 선수단을 자세하게 보면 당시 20세였던 골키퍼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1989년에 제만이 주전 골키퍼로 점찍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만치니는 특이한 시스템 속에서 본인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에 만족했고, 만치니는 항상 주의를 기울일뿐만 아니라 볼 소유에 자신감을 갖게 됐고, 공이 올 때 반응하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파스콸레 팔달리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수비진에서 주전 센터백이 되었다. 포자가 세리에 A로 승격한 후, 팔달리노는 21세였던 살바토레 마트레카노와 짝을 이뤘다. 한편, 제만의 트리덴테(tridente, 3톱을 표현하는 이탈리아어)에선 23살 동갑내기 시뇨리와 프란체스코 바이아노와 1989년에 이들보다 2년 일찍 태어난 로베르토 람바우디로 구성됐다. 젊은 선수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팔팔한 체력을 바탕으로 선수들은 제만란디아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만의 비전을 받아들였고, 수 년에 걸쳐 함께 훈련하고 경기하면서 적응하고 발전하며 그러나, 제만의 공격적 사고방식은 리그 내 세 번째로 많은 실점을 기록하면서 제만의 축구는 양날의 검임을 보여줬다.

포자 칼초를 이끌던 제만의 축구에서 양날의 검이 잘 드러났던 경기는 1992년 5월 24일 파비오 카펠로가 이끌던 AC 밀란과의 최종전이었다. 당시 리그 33경기 무패와 함께 스쿠테토를 차지하며 세리에 A에서 강력한 팀이었던 카펠로의 밀란을 상대한 제만의 포자는 물러서지 않았고 시뇨리와 프란체스코 바이아노의 골 덕분에 전반 종료까지 2-1로 이기며 밀란의 무패를 깨는 이변을 연출하는 듯했다. 하지만 제만은 만족하지 않고 계속 공격적인 축구를 주문하다 급격히 무너지며 2-8 대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팬들은 패배했음에도 즈데네크 제만과 포자에 박수를 보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포자는 한순간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팬들의 박수갈채에 고무 받은 제만은 자신의 철학을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됐고 오히려 철학이 확고해지게 된다.

라치오 시절 제만이 발굴한 알레산드로 네스타. © Chiesa Di Totti

제만은 라치오 감독으로 선임됐다. 라치오는 2년 만에 2위와 3위를 차지하였다. 라치오에서 첫 시즌인 1994-95시즌 라치오는 경기당 두 골 이상(34경기 69골)을 터뜨렸다. 포자 시절 함께한 람바우디와 시뇨리, 페널티 박스의 여우 카시라기가 트리덴테를 이루고 라치오에서 변함없이 보여주는 제만의 시그니처인 4-3-3 포메이션은 여전히 훌륭한 공격력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팬들을 매료시키는 연계 플레이, 지역 방어까지 펼쳐 보이며 진정한 제만란디아를 펼쳤다. 포자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긴 경기는 아주 큰 점수차로 이겼다. 5-1로 나폴리와 파도바를 격파하고 제만의 친정팀 포자는 7-1로 대파했다. 다만 질 때는 아주 큰 점수차로 지는 것도 여전했다. 피오렌티나한테 2-8이라는 치욕적인 패배를 기록했는데, 이는 1952-53 시즌 유벤투스와의 경기 이후 두 번째 8실점 경기였다. 디펜딩 챔피언 AC 밀란에게 홈에서 0-4 패배를 기록했다. 유벤투스에겐 홈에서 0-3으로 졌고, 인테르는 홈, 어웨이 합산 1-6으로 패배를 기록했다. 네스타와 파벨 네드베트 등 선수 육성과 영입 부분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라치오가 원했던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고 1996-97 시즌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제만은 1997년 1월에 경질됐다.

라치오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는 이탈리아 수비의 중심이 되는 알레산드로 네스타를 발굴한 것인데, 제만 부임 당시 알레산드로 네스타는 19살이었다. 제만은 "라치오에 온 첫날부터 네스타의 실력을 눈치챘다. 네스타는 라치오 프리마베라에서 뛰곤 했지만 항상 우리 1군과 함께 훈련했다. 보드진은 네스타를 세리에 C 팀으로 임대로 보내기를 원했지만 나는 네스타를 계속 라치오에 잔류하도록 설득했다."라고 말했다. 제만은 19세였던 네스타를 주전 수비수로 기용했고 네스타의 기량을 일취월장하며 훗날 이탈리아 수비의 중심으로 자리잡는다. 네스타는 은퇴 즈음에 "모든 어린 선수들은 제만에게 지도받길 희망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제만의 육성 능력을 칭찬했다. 당장 네스타 본인부터 수혜자였으니 제만의 육성 능력을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토티에겐 은사와도 같은 제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도 같았던 어린 토티는 제만 아래에서 기량을 만개했다. © Calciopédia

1997년, 제만은 라치오의 라이벌인 AS 로마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1999년까지 로마를 지도했다. 로마 부임 이전 라치오에서 경질되며 화가 난 제만은 다른 구단에 들어가 스쿠데토를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복수를 맹세했지만, 로마가 그를 불러 관심을 표명했을 때 그는 믿지 않았다. 영국의 스포츠 작가 겸 방송인 제임스 혼캐슬은 당시 전화로 진행된 제만과 센시의 대화가 이렇게 진행됐다고 묘사했다.

"여보세요, 로마 회장 프랑코 센시입니다."
"오, 그래? 너가 센시면 나는 나폴레옹이다."


그리고 나서 제만은 전화를 끊었다. 로마가 본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제만은 로마가 본인에 관심이 있는 것을 믿고 결국 1997년에 로마에 합류했다. 당시 로마엔 카푸, 마르코 델베키오, 아벨 발보, 그리고 21세의 어린 나이였던 프란체스코 토티가 있었다. 당시 로마는 중위권을 기록하는 데 그치며 부진을 면치 못했던 반면 즈데네크 제만이 이끌던 로마의 라이벌 라치오는 3시즌 동안 2위, 3위, 4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제만이 로마에 남긴 유산 중 단연 돋보이는 건 로마의 반디에라 프란체스코 토티의 전성기를 여는 데 크게 일조한 것이다. 제만은 기존의 감독들과 달리 세밀한 공격 전술을 토티에 적용시키고 토티에겐 생소했던 왼쪽 윙에 기용시켰지만 오히려 토티는 삼각편대 공격진에 적응한 이후 오히려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윙으로 뛰면 상대 풀백 한 명만 제친 후 바로 슛이나 좋은 패스를 뿌릴 수 있는 상황은 토티에겐 오히려 물 만난 고기와도 같이 편안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만의 혹독한 체력 훈련은 토티의 하체 근력과 근지구력이 향상되며 오랫동안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제만의 거침없는 4-3-3 아래에서 토티의 천재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고 제만이 이끈 로마는 4위, 다음 시즌 5위를 기록하며 중위권 탈출에 성공했다. 비록 후임 파비오 카펠로가 로마에 스쿠테토를 가져오며 전임 제만의 성과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제만이 로마를 세리에 A에서 경쟁력 있는 팀으로 되돌려놓으며 로마의 스쿠테토 획득에 일조하고 토티의 기량 만개라는 유산을 남겼다는 사실은 충분히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다.

로마 감독으로 재임 중이던 1998년, 제만은 <레스프레소>와 인터뷰에서 "약국에서 꺼져라"라며 비난하며 축구가 상업에 종속됐고 곳곳에서 부패를 저지르고 있다며 성토했다. 바로 유벤투스가 이탈리아 축구에 만연한 약물 도핑에 연루돼있다고 주장한 유벤투스 금지 약물 복용 의혹의 서막이었다. 제만은 1998년 7월, 유벤투스에서 뛰었던 잔루카 비알리와 알레산드로 델피에로(크레아틴 복용)를 언급하면서 이탈리아 축구계의 약물 남용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의혹은 8월 9일 토리노 지방 검찰 차장검사인 라파엘레 과리니엘로에 의해 사법 절차가 시작됐고, 유벤투스는 8월 10일 제만을 고소하였다. 한편 이탈리아 축구협회의 의뢰를 받은 CONI(이탈리아 국가 올림픽 위원회) 산하 도핑 조사단은 8월 11일 제만을 소환 조사한다. 이후 7년 반에 걸쳐 긴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고 결국 2004년 11월 유벤투스 팀 닥터 리카르도 아그리콜라가 1994년과 1998년 사이에 선수들에게 과다한 약물을 투여한 혐의가 인정되어 스포츠 관련 부정 죄목으로 징역 22월, 벌금 2천 유로를 선고받았고 유벤투스는 항소했다. 2005년 12월 무죄를 선고 국가에 의한 항소로 이어졌다. 2007년 3월 원심이 유지되었지만, 공소시효가 지나며 처벌받진 않았다. 존 풋은 "유벤투스가 도핑 재판에서 처벌받지 않았지만, 유벤투스의 이미지는 이 사건으로 인해 심각하게 손상됐다."고 기술했다. 판결 여부를 제쳐 두고, 중요한 것은 제만이 또 한 번 '실용적인 노선'을 거부했다 는 것이다. 그는 침묵이라는 전략적인 수단을 활용해 '고발자'라는 꼬리표를 면하고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위기를 겪던 팀의 구원자로 선임됐으나 결국 실패로 끝난 페네르바흐체 시절. © Borsa Gündem

로마를 떠난 제만은 1999년 10월 페네르바흐체 SK 감독으로 선임된다. 당시 페네르바흐체는 UEFA컵에서 조기 탈락 하는 등 팀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구단은 포자와 라치오, 로마에서 보여줬던 제만의 화끈한 공격력과 좋은 성적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만도 페네르바흐체어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준다. 4-3-3 포메이션을 고집했던 제만은 컵대회에서 3부리그 팀이었던 펜딕스포르에게 1-2로 패배하며 악화되던 여론에 쐐기를 박았고, 결국 2000년 1월 8일에 리그에서 거둔 2-2 무승부를 끝으로 3개월 만에 경질 되었다.

페네르바흐체 경질 이후 2000년 SSC 나폴리 감독으로 선임됐지만 개막 후 6경기에서 2무 4패라는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역시 짧은 기간 내에 경질됐고, 그 후 세리에 B 살레르니타나와 아벨리노에서도 실패를 전전하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4년 세리에 A 레체가 그동안 보여준 선수 육성 능력을 보고 제만을 감독으로 선임하는 도박수를 걸었다. 세리에 A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젊은 선수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던 제만은 좋은 시즌으로 보답했고, 발레리 보지노프와 미르코 부치니치와 같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면서 팀을 중위권으로 이끌었다. 이 시즌 레체는 리그에서 73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경기당 평균 2골에 가까운 수치였다. 직전 시즌 리그에서 43골을 득점했던 레체가 다음 시즌에 유벤투스를 제치고 팀 득점 1위를 기록한 것은 고무적이었다. 다만 리그 최다 실점인 73골을 실점하며 불안한 수비력도 동시에 보인 것은 흠. 레체에서 선전하며 오랜만에 좋은 모습을 보였던 제만이었지만 시즌 종료 후 제만은 사임했다.

레체 사임 후 9개월 만에 브레시아의 감독으로 부임한 제만은 2006년 3월 5일, 반년 만에 처음으로 브레시아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제만 감독이 부임할 당시 세리에 B 3위를 기록했던 브레시아의 순위는 제만 부임 이후 큰 하락세를 겪었고, 팀은 11경기에서 승점 8점을 기록하는 등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제만은 브레시아에서 사임했고, 이후 선수들이 자신의 전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2006년 6월 21일, 제만은 2005-06 시즌에 세리에 B로 강등된 레체와 1년 계약을 맺으며 복귀했지만 여기서도 제만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12월 24일에 해임됐다.​

2008년 6월 17일,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제만을 신임 감독으로 임명했다. 제만 커리어 역사상 첫 동유럽권 구단이었다. 그러나 제만의 첫 동유럽권 구단 커리어는 실패로 끝났다. 2008년 9월 6일 제만은 세르비아 수페르리그에선 24년 만에 처음으로 최하위에 머무르고 UEFA컵에서는 키프로스의 아포엘 FC에 밀려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부진한 결과로 경질되었다. 특히 리그 3경기 무득점은 닥공의 화신 제만에겐 자존심 상할 기록이었을 것이다.

2009년까지 제만은 10년 간 고난을 견뎌내야 했다. 그 해 칼초폴리 수사의 일환으로 소환되었을 때, 칼초폴리의 주역이자 前 유벤투스 회장인 루치아노 모지가 다른 구단 회장들에게 제만 본인을 고용하지 못하게 압박을 줬으며 자신이 강제로 쫓겨났다고 비난했다. 제만은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와의 인터뷰에서 "시스템 때문에 타이틀을 따지 못했다. 아마 내가 남아 있었다면 다른 이유로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칼초폴리를 생각한다면 이해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 시기 제만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 지 알 수 있다.

계속된 실패로 팀을 구하지 못하다가 2년 뒤인 2010년 7월 20일, 과거 유명세를 쌓았던 세리에 C 소속 포자 칼초 감독으로 선임되며 약 16년 만에 포자로 돌아왔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포자는 67골을 넣어 해당 시즌 6위에 올랐다. 하지만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제만은 1년 만에 팀을 떠나게 되었고, 페네르바체부터 시작된 반복되는 실패와 세리에 C에서도 승격에 실패하며 제만의 감독 커리어는 거의 끝나는 듯했다.

지는 해로 여겨졌던 제만의 부활을 알린 2011-12 시즌 페스카라. ©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그러나 이듬해 페스카라 감독으로 선임된 제만은 재기에 성공한다. 페스카라에서 4-3-3 포메이션에 기반을 둔 미친 공격 축구가 다시 통하며 세리에 B를 폭격했다. 2012년 5월 21일 삼프도리아 원정 경기에서 3-1로 이기며 세리에 A 승격을 확정지으며 취임 첫 시즌에 1부 리그 복귀를 확정지었고 최종전에서 세리에 B 우승까지 차지한다. 승격과 우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제만은 고난의 고리를 끊고 부활하게 된다. 이 시즌 페스카라는 42경기 90골이라는 경이로운 수준의 팀 득점을 선보였다. 2006-07 시즌 세리에 B에서 승격을 차지한 유벤투스도 제만의 페스카라보다 세리에 B에서 더 적은 골을 넣었다.

당시 제만 감독은 최전방 공격수에 유벤투스에서 임대 온 치로 임모빌레, 왼쪽 윙포워드에는 SSC 나폴리에서 임대로 합류했고 제만의 포자 시절 19골을 기록했던 로렌초 인시녜와 수비형 미드필더에 구단 유스 출신 마르코 베라티를 기용했다. 세 선수는 해당 시즌 기량이 일취월장하며 이탈리아와 유럽 축구의 중심으로 성장한다.

2011-12 시즌 종료 후 페스카라에서 맹활약을 지켜본 친정팀 AS 로마에서 감독직을 제안하고 제만이 이를 수락하며 1999년 이후 13년만에 로마 감독으로 복귀했다. 오랜만에 돌아왔지만 여전한 전술과, 과거 토티의 잠재력을 터트렸던 것 처럼 이번에는 에릭 라멜라, 마티아 데스트로, 마르키뉴스, 알레산드로 플로렌치 등 많은 유망주들이 제만 밑에서 잠재력을 터트렸고 엄청난 화력으로 리그 최다 득점도 기록하며 좋은 모습도 있었지만 제만 전술의 고질적인 단점인 수비 부재로 리그 최다실점과 부진한 리그 성적도 함께 있었고, 결국 2013년 2월 2일에 경질됐다.

이후 제만은 칼리아리 칼초, FC 루가노을 거쳐 2017년 2월 18일에 페스카라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2011-12시즌 이후 약 5년 만에 페스카라 감독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부임 후 2일 뒤에 치뤄진 제노아와의 경기에서 본인의 장기인 엄청난 공격력을 보여주며 제노아를 5:0으로 완파하고 24경기 1승에 그쳤던 페스카라에게 2번째 리그 승리를 안겨주며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남은 기간 1승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페스카라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2021년 6월 20일에 포자 칼초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약 4년 만에 감독직에 복귀했고, 10년 만에 다시 포자 감독을 맡게 됐다. 제만은 세리에 C 그룹 C 7위와 팔레르모(64골)에 이은 팀 득점 2위(62골)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권에 안착시켰으나 3라운드에서 비르투스 엔텔라에 밀려 승격에 실패하고 팀을 떠나며 현재까지 팀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축구팬들에게 2-0-8 포메이션으로 알려지며 컬트적인 인기를 끈 즈데네크 제만의 극단적 공격 전술. 유럽 축구계에선 독특하고 특이한 제만의 전술을 '제만란디아'로 부른다.

즈데네크 제만이 보여주는 전술을 현지에선 제만란디아(Zemanlandia, Zeman과 land의 이탈리아어인 landia를 합성한 것) 라 부른다. 현대 축구가 탄생한 이래로 많은 감독들은 그라운드 공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장악하는 방안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모법 답안은 아리고 사키가 제시했다. 사키는 경기장의 가로 길이인 70m를 커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숫자는 4명으로 결론지었고 백4에 4명을 한 줄 더 세우는 두 줄 수비 조직과 4-4-2 포메이션이었다. 제만은 본인의 홈페이지에서 4-3-3 포메이션 구성은 가장 정교한 롤렉스에 걸맞은 완벽한 메커니즘이라 극찬하며 4-3-3이 이상적인 포메이션인 이유를 설명한다.

"왜 4-3-3 인가? 그라운드 내 공간을 커버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다. 어떻게 이런 해결책을 얻었는가? 바로 기하학이다.(Perchè il 4-3-3? E' il modo più razionale per coprire gli spazi" Come è arrivato a questa soluzione? "E' geometria)"

- Zeman.org (즈데네크 제만 개인 홈페이지)

실제로 4-3-3 포메이션에서 각 선수들을 선으로 이으면 수많은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제만의 말대로 4-3-3은 모든 구역에서 3명 이상이 상대를 에워싸며 대응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식이다. 학창 시절 핸드볼에서 영감을 받은 제만란디아는 4-3-3 포메이션을 기본으로 모든 지역을 고르게 장악해 공간을 확보하고 90분 내내 강한 압박과 지속적인 공격, 활발한 공수 전환을 시도한다. 사실 제만란디아의 핵심만 놓고 본다면 리누스 미헐스가 아약스와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완성해낸 토털 풋볼이 떠오른다. 이 때문에 혹자는 제만란디아가 리누스 미헐스가 완성시킨 토털 풋볼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제만은 제만란디아가 본인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전술임을 밝혔다.

실제로 토털 풋볼과 토털 풋볼의 영향을 받은 바르셀로나의 축구는 제만란디아와 똑같은 포메이션인 4-3-3을 채택한다. 하지만 제만란디아와 토털 풋볼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제만란디아와 같은 포메이션을 채택한 바르샤의 토털 풋볼은 낮고 짧은 패스를 계속 시도하며 점유율을 높이지만 제만란디아는 상대 진영으로 롱 볼을 보내면 기하학에 따라 볼 소유 확률이 높아진다고 봤다.

압도적으로 강한 전력의 팀을 만나면 실점을 줄이며 패배 확률을 줄이기 위해 수비적인 전술로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나 큰 점수 차로 승리나 패배하는 것을 지양하던 이탈리아 축구계에선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제만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직 공격을 시도했다. 크게 앞서가는 상황에서도 끝없이 공격을 하다 보니 제만이 맡는 팀에서는 4골 차, 5골 차 이상 승리를 자주 볼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수비를 소홀히 하는 공격 성향으로 인해 크게 앞서가는 상황에서도 공격을 시도하다 동점을 허용하거나, 강팀 상대로 리드를 잡아놓고 계속해서 공격하다가 역전을 허용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세리에 B 우승을 차지했던 2011-12 시즌 페스카라 시절 제만란디아

제만란디아 아래 각 포지션이 가지고 있는 역할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골키퍼는 슛을 잘 막는 것뿐만 아니라 오프사이드 트랩을 예상할 수 있는 경기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골라인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또한 손과 발로 공을 잘 컨트롤하고 드리블하는 능력, 그리고 볼 배급을 잘해야 한다. 이 역할, 오늘날 스위퍼 키퍼가 떠오른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골키퍼도 필드플레이어의 일부로 여겨지며 발 밑 기술도 골키퍼의 덕목으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20년 전에 이를 적용한 제만란디아의 혁신과 선구자적인 면모에 대단함을 느낀다.

제만란디아의 핵심인 양 풀백은 지속적인 오버래핑과 박스 안으로 제공하는 크로스를 통해 공격을 창출하고 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미드필더 대부분이 공격적으로 올라선다. 제만의 3미들 시스템에서 수비형 미드필더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를 배치한다. 미드필더들은 수비적으로 효과적이어야 하지만, 그는 또한 다시 점유한 후에 공격적 플레이를 만들어내고, 공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공격적으로 득점할 수 있어야 한다. 빠르고, 열심히 뛰고, 피지컬이 좋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플레이, 좋은 롱패스와 태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만란디아에서 미드필더는 메토디스타(이탈리아 축구 용어로 센터 하프백)에 비유하는데, 이는 선수가 미드필더에서 플레이를 지시하거나, 빠른 공격을 가하거나, 수비적으로 보조할 뿐만 아니라 포지션을 유지함으로써 간격을 거의 두지 않고 높은 수비 라인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격과 방어. 좌우 중앙 미드필더들도 기교와 공격력, 패스 능력이 뛰어나고, 활발히 그라운드를 누비는 박스 투 박스 선수여야 한다.

중앙 수비수는 헤딩 능력, 맨 마킹, 태클, 점프, 페이스, 포지셔닝 및 가속력뿐만 아니라 발기술과 볼 플레이 능력이 뛰어나고 강해야 한다. 두 명의 중앙 수비수 중 한 명은 오프사이드 트랩이 불가능할 때마다 수비 라인에서 더 뒤로 떨어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리베로나 스위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제만란디아의 핵심이자 꽃인 트리덴테 구성원인 공격수는 빠르고 기술적이어야 하며, 제만의 계획에서 철저히  수많은 골 기회를 살릴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이 먹히면 삼각형을 이뤄 끊임없이 전진 패스를 투입하며 공격권을 잡을 수 있다. 좌우 윙어는 안으로 침투해 직접 슈팅을 노리고 포지션 스위칭을 많이 시도한다. 그러다 볼 소유권을 빼앗기면 수비에 가담해 전방 압박을 펼친다. 포자와 라치오에서 제만과 함께 뛰었던 주세페 시뇨리는 "제만이 용납하지 않는 것은 오직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누군가 동료에게 조심스럽게 공을 건네줄 때, 두 번째는 상대 팀의 페널티 박스로 볼을 전하는 대신 코너를 향해 달려갈 때다. 왼쪽을 볼 필요도 없고, 오른쪽을 볼 필요도 없고, 뒤를 볼 필요도 없다. 오직 앞만 봐야 했다."라고 말하며 제만의 전진적인 공격 전술을 묘사했다.​

제만은 혹독한 훈련, 특히 체력 훈련을 강조했다. 제만란디아가 공격적인 축구와 활발한 압박을 추구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제만이 혹독한 체력 훈련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2012년 AS 로마 감독 시절 구단 기자회견에서 당시 언론은 제만의 혹독한 체력 훈련 방법을 비판했지만 제만은 "당신들의 우려와 달리 (나의 체력 훈련 때문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 열심히, 그리고 더 오래 훈련하면 더 많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는 발언을 하며 세간의 비판을 반박했다.

요약하자면 제만이 추구하는 강한 압박과 높은 수비 라인은 타고난 끈기,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일 수 있는 체력과 의지가 필요했다. 골키퍼 또한 루즈볼 처리를 위해 언제든 페널티 박스 밖으로 뛰쳐나올 마음가짐을 기본으로 갖고 있어야 하고 공격 전개에도 깊게 관여해야 한다. 전방에서 뛰는 선수들은 포지션에 대한 집단적 이해, 유동성, 연계까지 갖춰야 하며 꺾이지 않고 돌파와 반복된 훈련을 통해 숙달한 움직임 등도 요구한다. 제만란디아에서 뛰며 제만이 길러낸 선수들은 어느 팀에서 뛰든 잘 융화될 수 있는 높은 전술 이해도와 기술 수준을 갖추며 훌륭한 선수로 성장한다.

제만을 논할 때 선수 육성을 빼고 이야기하면 섭섭하다. 제만란디아는 젊은 선수들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리키타와 포자 시절부터 젊음은 제만의 철학을 녹여낸 팀을 이루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화끈한 공격 축구를 표방하는 제만란디아답게, 제만의 밑에서 뛰었던 공격수 상당수가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제만란디아의 공격 전술에서 정교함이 뛰어났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만 부임 이전 무명에 가까웠지만 제만 부임 이후 세리에 B 득점왕과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골든볼, 골든슈와 발롱도르 2위를 기록하며 기량을 만개한 살바토레 스킬라치, 포자 시절 미드필더에서 최전방으로 기용하며 훗날 라치오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으로 성장시킨 주세페 시뇨리, AS 로마의 반디에라인 프란체스코 토티, 페스카라 치로 임모빌레 라치오 시절에는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파벨 네드베트, AS 로마에선 카푸, 아우다이르, 루이지 디 비아조, 주세페 파발리 등의 등이 그의 지휘 아래에서 세계적 선수로 발돋움했다. 제만란디아가 국내의 해외축구 팬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알려졌던 페스카라 시절에는 치로 임모빌레와 로렌초 인시녜, 마르코 베라티가 이 시즌 기량이 일취월장하며 향후 아주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로마 2기 시절엔 에릭 라멜라, 알레산드로 플로렌치와 무명의 신예였던 브라질 국적 수비수 마르키뉴스가 엄청난 경험치를 먹고 유럽 최고의 센터백 유망주로 떠오르며 프랑스의 명문 구단 PSG로 이적한다.

"요즘 감독들은 선수를 키우려 하지 않고 그냥 팀을 꾸 리려고만 해. 결국 좋은 감독을 만드는 건 선수들이야. 하지만 오늘날 선수를 다듬어내는 감독은 거의 없어. 물론 나는 그 거의 없는 감독군에 속하지."라고 말한 것은 세계적인 선수들을 많이 키워본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자신감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제만의 커리어 전체를 놓고 볼 때 세계적인 명장들이 이뤘던 성공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거리감이 있다. 커리어의 대부분을 중하위권 팀을 지휘하기도 했고 1994-95 시즌 라치오 시절 세리에 A 준우승이 커리어 사상 최고 기록으로 1부리그에서 이렇다 할 우승 경력은 없고 하부 리그까지 넓혀 봐도 리카타 칼초 시절 세리에 C2에서 1번(1984-85), 포자 칼초(1990-91)와 페스카라 시절(2011-12) 세리에 B에서 2번 우승이 전부다.

하지만 낭만적이고 정교하며 매력적인 전술인 제만란디아는 유럽 축구 감독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제만과 동시대에 감독직을 역임하고 현대 축구의 기틀을 다진 감독으로 평가받는 아리고 사키는 제만과 제만란디아를 두고 "제만은 이탈리아 축구의 몇 안 되는 천재 중 한 명이다. 제만은 거물급 선수 없이도 장관을 연출할 수 있고 제만란디아는 조화와 아름다움을 갖춘 하나의 심포니와 같다. 제만란디아는 확고한 스타일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즐거움은 보장되고 지루함과 시간 낭비는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팀에 제만과 같은 감독이 있다면, 경기장은 가득 찰 것이다."라며 제만을 칭송했다.

현직 감독 중 세계적인 명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펩 과르디올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르디올라는 페스카라 시절 제만의 성향과 전술에 대해 "제만은 솔직하고 용감하며 열정적인 사람이다. 선수 시절 이탈리아에서 뛰었을 때부터 제만을 알고 있었다. 제만이 이끌었던 팀들은 미적으로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들의 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제만의 전술 밑에서 뛰는 선수들은 모두 전방을 향해 미친 듯이 뛰기 때문이다. 제만은 내가 매우 존경하는 감독이다."라고 발언하며 높이 평가했다. 과르디올라의 극찬대로 과르디올라는 어쩌면 바르셀로나 시절 드림팀으로 불렸던 그의 축구인 4-3-3 업 템포 토털 풋볼이 제만란디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만은 현대 축구를 한때 아름답고 순수했던 축구가 여러 요인에 의해 타락했다는 시선으로 지켜본다. 제만은 축구에서 자본과 정치가 급부상한 현실에 한탄하고, 제만의 입장에서 흥이 깨지는 수비적인 전술을 질타하며, 부정행위와 부패한 권력 기관에 대해 전방위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렇기에 제만은 앞서 언급한 요인들로 인해 오염된 현대 축구에 한탄하며 과거 축구가 가지고 있던 낭만을 지키고자 했다. 제만은 2015년 말 스위스 언론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과의 인터뷰에서 "때때로 우리는 졌지만 팬들은 우리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라고 발언했다. 축구 감독 제만은 전형적인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결과를 쫓고 성과를 중시하는 비즈니스 리더보단 관중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이는 임무를 수행하는 무대 감독에 가까웠다. 제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는 팬들의 환호와 감사였다. 그리고 제만란디아가 90분 동안만이라도 아름다운 공격과 짜릿한 움직임을 통해 관중들이 복잡하고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어 얼굴에 미소를 띠는 경기가 된다면 제만에겐 승리보다 더 큰 기쁨일 것이다. 제만은 실용주의가 팽배했던 축구에서 낭만을 찾고자 했고 그의 소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제만란디아'였다.

2022년 기준 75세인 제만의 감독 커리어는 현재 황혼기를 달려가고 있다. 이탈리아 가수이자 로마 팬인 안토넬로 벤디티는 1999년에 제만 헌정곡인 <La Coscienza di Zeman>에서 "Percheon cambi mai"라는 가사가 반복하면서 곡을 마무리한다. 혹자는 이 가사가 반복되는 이유가 50년이 넘는 긴 감독 커리어에서 한결같은 그의 신념과 철학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필자도 동의한다. 제만의 긴 감독 커리어 기간 동안 그의 사전에 타협과 포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한결같음만이 존재했다. 많은 실패와 비난이 그에게 어떠한 장애물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만은 뚝심 있게 본인의 철학을 밀어붙였다.

어쩌면 아리고 사키와 펩 과르디올라가 제만란디아를 극찬한 이유가 여기 있을 지도 모른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으론 세상 이치가 부처로 보인다는 불안돈목(佛眼豚目)처럼, 혁명가인 사키와 펩의 눈에는 주변의 비난과 실패라는 시련에도 결코 본인의 색깔이 진하게 드러난 철학을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제만의 진가를 알아보고 진정한 혁명가로 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겐 그런 제만과 제만란디아가 대단하게 보였을 것이다. 필자가 너무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필자가 펩이나 사키가 아닌데 너무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필자는 축구계에 이름을 남긴 혁명가들이 많은 칭송을 받는 것처럼 제만 또한 이들과 같이 칭송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이 글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리라 생각한다. 향후 제만이 다른 팀 감독으로 선임되더라도 제만은 한결같이 자신의 철학을 밀어붙일 것이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게 제만에겐 익숙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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