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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축알못이라도 칼럼이 쓰고 싶어!] 새천년 충칭을 밝게 빛낸 충칭의 별, 이장수

by 뚜따전 2021.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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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수 감독은 충칭 리판(重庆力帆, 현재 충칭 량장 징지)을 중국 갑급A리그 4위, 중국축구협회 FA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 蛋蛋赞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그렇겠지만, 필자는 유튜브를 많이 이용한다. 그 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하는 필자는 축구 경기, 축구 다큐멘터리 등 축구와 관련된 영상을 많이 보다 보니 축구 관련 영상이 유튜브 알고리즘에 따른 추천 영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다 며칠 전, 인간극장에서 2000년에 방영했던 <충칭의 별>편을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시청했다.

영상 속에서 나온 이장수의 충칭은 단순히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 뿐만 아니라 열악한 시설과 환경에 놓여져 있었다. 이 당시 충칭은 다른 팀처럼 전용구장도 없었고, 2군 팀도 없었으며 훈련장과 체력 단련실도 겨우겨우 빌려 쓰는 사정이었다. 선수와 팀이 성장하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던 셈.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장수 감독은 오히려 개의치 않고 구단 훈련, 체력 단련 등을 직접 관리하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노력과 열정이 결실을 맺으며 마침내 중국축구협회 FA컵 우승까지 차지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감동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렇기에 이 영상을 보고 나는 이장수 감독의 스토리를 칼럼으로 써 보기로 결심했다. 너무나도 부족한 글 솜씨이지만, 충칭에서 이장수 감독이 보여준 신화를 여러분께 들려드리려 한다.

이장수 감독이 충칭 땅을 처음 밟았던 1998년은 중국에 한국인 감독이 대거 진출했던 시기다. 故 최은택 감독이 강등 위기에 있던 옌볜 현대(현 옌볜 푸더)의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4강까지 끌어올려 화제를 모은 후 김정남(산둥 루넝), 박종환(우한 훙진룽), 차범근(선전 핑안)이 중국으로 진출하며 중국 리그 내 한국인 감독 진출 러쉬가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 땅은 감독들에게 무덤이었다. 1998년 한 해만 해도 중국 프로 1부 리그에서 열여덟 차례나 감독 교체가 있었다. 당시 갑급 A리그에는 총 14개 팀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1999 시즌 14번, 2000 시즌에는 12번 감독을 경질했다. 한 시즌 동안 한 팀에서 두~세 차례 감독을 경질하는 일도 흔했다. 현지 팬들은 3연패만 하면 감독을 경질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물론 이는 한국 감독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김정남, 박종환, 차범근 등 한국인 감독들 모두 줄줄이 짐을 쌌다.

선수 시절 장신 스트라이커로 주목을 받으며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중앙대와 연세대 이중계약 파동으로 인해 출전 정지 2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은 이장수 감독은 출전 정지가 풀린 이후 태극마크까지 달았지만 결국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택한다. 은퇴 후 호남대와 일화 천마 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이장수는 박종환 감독의 후임으로 천안 일화(성남 일화의 전신, 현 성남 FC) 감독직에 올랐다. 하지만 1년 만에 천안 일화를 떠난 이후 2~3개월 휴식을 취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 이장수는 1997년 브라질 유학을 떠났고, 10개월 후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국내 축구팀 사령탑을 맡지 못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직장이 필요했던 이장수 감독은 중국 슈퍼리그가 탄생하기 한참 전인 지난 1998년 충칭 룽신 감독직에 부임하며 중국 무대와 인연을 맺었다.

1995년 중국전위체육협회가 후베이 우강(湖北武钢) 리저브 팀을 인수해 우한 첸웨이(武汉前卫)를 창단하면서 충칭 리판의 역사가 시작된다. 1996년 중국전위체육협회와 공안부 산하 기업인 환다오그룹이 공동으로 출자하며 첸웨이 환다오(前卫寰岛)로 이름을 바꾼 후 펑즈강(冯志刚), 쉬타오(徐弢), 순칭(孙庆), 황촨훙 등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며 갑급 B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갑급 A리그에 승격했다. 갑급 A리그 승격 이후 구단은 하이난 성 하이커우로 연고지를 이전하려 했으나 적절한 경기장이 없어 무산됐고 결국 인구가 많은 충칭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이장수 감독이 충칭에 부임하기 이전 충칭은 갓 승격한 승격팀으로서 평범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장수 감독은 충칭 부임 이후 철저한 팀 관리를 시행했다. 이장수 감독 부임 당시 충칭 선수들은 술, 담배를 즐겨했고 무절제한 생활을 즐겨하며 배가 나온 선수도 있을 정도로 팀 내 프로 의식 부재 문제가 심했다. 이장수 감독은 팀의 성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프로 의식 부재 문제를 강력하게 고치고자 했다. 이장수 감독은 구단이 잡아준 호텔을 거절하고 선수들과 팀 숙소에서 합숙하며 팀 상벌제도를 정비했고 체력 단련실에서 하는 체력 훈련과 부임 3일 차부터 선수들과 충칭 시내를 7바퀴를 같이 돌 정도로 체력 단련까지 직접 주도했다.(전문적인 피지컬 코치가 당시 구단 내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장수 감독은 기초 체력과 조직력을 중요시하며 팀의 결속력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처음 이장수 감독의 훈련을 받았던 충칭 선수들은 이장수 감독의 훈련을 지옥훈련과도 같다고 묘사했다. 그만큼 이장수 감독은 강력한 훈련을 통해 팀의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또한 이장수 감독은 팀 내 유명 선수들을 포함해 팀 내 기강에 해가 되는 선수들은 실력이 좋은 선수라도 예외 없이 과감하게 팀 구상에서 제외했다. 이장수는 가오펑(高峰)의 실력은 인정하면서도 가오펑의 워크에식에 대해서는 "술을 자주 마시며 훈련을 게을리 한다"고 지적했다. 팽팽한 대립 끝에 이장수는 가오펑을 벤치 명단에 엔트리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가오펑은 시즌 끝까지 주전에서 밀리며 출전하지 못해 충칭을 떠나 베이징 궈안으로 돌아갔다. 이장수 감독은 강인한 모습을 보이며 중국 내에서 화제가 됐다.(가오펑은 훗날 메스암페타민 복용 혐의로 2015년 징역 7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019년엔 마약 복용 및 소량의 마약 불법 소지 혐의로 베이징 마약 관리국에 체포됐다.)

이장수 감독은 당시 실리적인 축구가 성행했던 중국 축구계에서 공격적인 축구를 보여주며 축구팬을 끌어모았고 성적도 겨우겨우 잔류할 정도로 하위권에 들었던 팀을 중위권까지 상승시키며 중국 내 경쟁력 있는 팀으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장수 감독이 공격적인 축구를 표방하려 했던 이유는 바로 팬들을 위해서다. 당시 축구 경기를 보러오는 팬들의 직업은 노동자였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팀을 응원하기 위해 버는 돈의 상당수를 입장료에 썼다. 좋아하는 팀을 위해 상당한 돈을 쓰는 만큼, 재밌고 공격적인 축구로 쓴 돈이 아깝지 않게끔 하려는 이장수 감독의 팬 프렌들리 정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장수 감독의 철저한 관리와 열정 덕분이었을까? 충칭에서 2년차가 되던 해인 1999년 성적이 급상승하면서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잔류 싸움을 벌였던 충칭을 리그 4위까지 올렸다. 자연스레 의구심을 품었던 중국 내 여론을 이장수 감독의 지도력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이후 이장수 감독은 1999 시즌 종료 후 재정 상황이 좋은 강팀에서 기존 충칭에서 받던 돈보다 두 배 가까운 연봉을 제시할 정도로 다른 팀에서 러브콜을 많이 받았지만 결국 충칭에 잔류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베이징 궈안에서 경질된 후인 2010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999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선양 화양에 져주면 거액을 주겠다는 브로커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즉, 승부조작을 제의한 것.

부정을 증오했던 이장수 감독은 단칼에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결국 이장수 감독과 외국인 선수 두 명만 빼놓고 선수들과 구단이 결탁해서 후반 경기를 이상하게 몰고 갔다. 선수들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이장수 감독은 경기 종료 전에 양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렸고 경기 후 언론을 향해 승부조작이라고 폭로했지만 유야무야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이는 결국 승부조작임이 드러나면서 중국 축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가능성을 보았지만 흑역사도 있었던 1999년이 지나고 2000년, 충칭은 가난한 구단 사정으로 인해 시즌 전 주전 선수 3명을 이적시키며 전문가들의 예상 순위에서 하위권으로 분류됐다. 핵심 선수의 이적, 열악한 재정과 시설. 충칭의 선전을 예상하는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예상은 그대로 빗나갔고 이장수 감독과 충칭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최고의 한 해가 된다.

몇년 간 이어져 온 오심과 편파 판정에 고통받은 이장수 감독은 지쳤고, 결국 사직서 제출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 인간극장 &lt;충칭의 별&gt;

그러나 대위기가 찾아온다. 2000년 5월 18일, 베이징 궈안과의 리그 홈 경기에서 충칭에게 불리한 오심과 편파 판정, 충칭을 향한 집중 견제가 경기 내내 이어졌다. 결국 석연찮은 판정으로 베이징에 페널티킥 실점을 기록하고 패배를 기록하자 충칭 팬들과 이장수 감독은 석연찮은 판정을 연이어 하는 심판에 분노했다. 이어진 5월 21일 산둥전에서도 공격의 흐름을 끊는 교묘한 판정 때문에 패배를 기록한 후 이장수 감독은 구단에 사직서를 제출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장수 감독은 후일 인터뷰에서 한국 감독이라는 이유로 이런 피해를 본다면 선수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심한 것.

충칭 시민들은 이장수 감독을 절대 떠나보낼 수 없었다. © 인간극장 &lt;충칭의 별&gt;

그러나 충칭 시민들은 이장수 감독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충칭 시민들은 이장수 감독이 충칭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후 구단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하며 10,000명 서명 운동을 벌였고 심지어 혈서를 쓰고 이장수 감독을 찾아가 애원하며 무릎까지 꿇을 정도로 절박하게 만류했다. 중국인 입장에서 외국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라 할 정도라 말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다. 그런 중국인들이 이장수 감독에게 무릎을 꿇으며 떠나지 말아달라 애원했던 모습은 진심으로 충칭 시민들이 이장수 감독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칭 시민들과 구단의 적극적인 만류는 팀을 떠나려는 이장수 감독의 마음을 돌렸고 산둥전 4일 후인 25일 이장수 감독은 사퇴를 번복하고 충칭에 남았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이장수 감독에게도, 충칭 구단에게도 후회 없는 최고의 선택이 됐다.

FA컵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준결승까지 오른 충칭의 FA컵 준결승전 상대는 산둥 루넝이었다. 산둥은 1999 시즌 중국 갑급 A리그와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중국 최초로 더블을 기록한 강팀이다. 충칭 입장에선 단단히 준비해야 할 강팀.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산둥 구단이 충칭에 훈련할 장소를 제공하지 않은 것. 게다가 충칭은 기차를 장시간 타고 타이산에 와야 했다. 결국 충칭은 훈련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경기에 나서야 했다. 초반 충칭은 산둥에 선제골을 헌납했지만 이장수 감독의 충칭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선다. 결국 3-1로 역전승을 기록하며 오후에 겪어야 했던 텃세의 설움을 한 방에 날렸다. 경기 후 슬로보단 산트라치(Слободан Сантрач, Slobodan Santrač)감독의 경질은 덤.

이장수 감독의 충칭의 돌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갑급 A리그 4위, 중국축구협회 FA컵 결승 진출을 기록했다. 충칭의 FA컵 결승 상대는 지난 5월 18일 석연찮은 판정으로 얼굴을 붉혔던 베이징 궈안이었다. 준결승전 산둥에 이어 2번 연속으로 판정과 관련해 악연이 있던 팀과 FA컵에서 상대팀으로 만나게 됐다.

충칭 리판은 창단 첫 FA컵 우승을 위해, 그리고 충칭을 응원해주는 팬들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1차전에선 0-1로 졌지만 2차전에 4-1로 대승을 거두며 합계 점수 4-2로 베이징 궈안을 누르고 클럽 역사상 첫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 날 경기장을 찾은 3만 관중들은 물론 충칭 시민들까지 충칭 리판의 우승이 알려지자 거리로 나와 이장수 감독을 연호하며 열광했다. 이장수 감독은 한국인으로서 중국 프로축구에서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 됐고 대회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었던 충칭 리판에겐 우승컵은 충칭 내에 큰 경사와도 같은 대사건이었다.

FA컵 우승 이후 충칭 내 이장수 감독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충칭의 별'이란 애칭을 얻은 이장수 감독은 충칭 시내를 돌아다니면 이장수 감독에게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것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당시 충칭시에 결성됐던 100여개의 축구단 팬클럽 중 절반 이상이 이장수 감독의 개인 팬클럽이었고 3000만 명의 인구 중 대략 1000만 명이 충칭의 팬이며 그 중 2만 명 이상이 이장수 감독 팬클럽의 정식 회원이었을 정도였다.

2000년 11월 16일, 새천년을 본인 축구 인생의 최고의 해로 장식한 이장수 감독은 중국 올해의 감독을 수상한다. © 신화통신

충칭시는 열악한 구단 환경에도 불구하고 충칭을 이끌고 창단 첫 FA컵 우승을 차지한 이장수의 공로를 기려 충칭 명예시민 칭호를 수여했고 이장수 본인도 2000년 11월 16일 중국 올해의 감독을 수상하며 새천년을 이장수 감독 축구인생 최고의 한 해로 장식한다.

2001년 12월 16일, 이장수 감독은 정든 충칭을 떠났다. 충칭의 별이 지는 순간이었다. © 소후
충칭 팬들에게 이장수 감독은 각별한 존재였다. 이장수 감독의 품에 안긴 남성은 이장수 팬클럽 회원. © 신화통신

중국 갑급 A리그 4위와 FA컵 우승을 차지하고 FA컵 우승의 주역 이장수 감독이 구단에 잔류하며 충칭 팬들은 다음 시즌 선전을 기대하게 된다. 그렇게 맞이한 2001 시즌, FA컵 우승 팀 자격으로 출전한 아시안컵 위너스컵에선 알힐랄, 전북 현대, 알사드에 이어 4위에 올랐지만 7승 10무 9패를 기록하며 지난해와 비교하면 부진한 순위인 리그 11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여기에 모기업이 바뀐 구단과 지난 시즌 좋은 성적을 기록했던 외국인 선수의 방출, 지휘권 개입 등으로 끊임없이 마찰을 빚은 끝에 일찌감치 이번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날 것이라 선언했다.

구단과의 마찰을 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 리판그룹의 충칭 인수 이후 충칭의 새 구단주가 축구단 인수 조건으로 이장수 감독의 잔류를 제시했다. 그 때 이장수 감독은 구단주를 만나 팀에 잔류하는 대신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이장수 감독이 제시한 요구사항은 선수 연봉 최소 10~15% 인상, 외국인 선수 세 명 확보, 3년 간 동결된 코치들 연봉 인상, 선수 경기 수당 인상, 이장수 감독 연봉 인상이었다.

충칭 리판 측은 이장수 감독이 요구한 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했고 요구 조건 이행 약속을 받은 이장수 감독은 충칭에 잔류했다. 하지만 요구 조건 중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았고 이장수 감독은 시즌 후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때는 팬들이 먼저 떠나라고 했다. 구단의 실책으로 감독이 떠나는 것이니.

2001년 12월 16일, 이 날은 이장수 감독이 충칭 감독으로서 지휘하는 마지막 경기였다. 충칭이 산시 궈리(陕西国力足球俱)(2005년 하얼빈 궈리로 팀명 변경, 2005년 해체) 를 2-0으로 승리한 이 날 경기장에 있던 수만 명의 충칭 팬들은 경기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관중석에서 일어나 4년 동안 충칭을 이끌었던 이장수 감독을 배웅했다.

2002년 11월 16일 칭다오 이종의 중국축구협회 FA컵 우승 후 이장수 감독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신화통신

충칭을 떠난 지 1달 후인 2001년 12월 16일, 이장수 감독은 중국 갑급 A리그에서 중~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던 칭다오 이종(현 칭다오 중넝)과 계약을 맺고 3일 후인 12월 19일 부임했다.(사실 이장수 감독은 칭다오와 2개월 전부터 꾸준히 감독직 논의를 해 왔으며 칭다오 감독 계약 보도 당시 입단에 대한 대략적인 합의는 마친 상태였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2002 시즌 칭다오는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좋은 리그 성적인 8위를 거두었고 2002년 11월 16일 중국축구협회 FA컵 결승 1차전에선 3-1로 패배했지만 2차전에서 2-0으로 승리, 1승 1패를 기록하면서 합계 점수 3-3을 기록했으나 원정 다득점 우선 원칙에 따라 칭다오가 승리하며 창단 첫 중국축구협회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이장수는 2년 만에 다시 중국축구협회 FA컵 왕좌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2003년 5월 26일, 칭다오시는 "이장수 감독이 칭다오시 축구 발전에 훌륭한 공헌을 했다"는 점을 인정해 칭다오 명예시민을 수여했다. 이장수 감독은 충칭에 이어 2번째로 명예시민 수여를 받은 셈.

충칭과 칭다오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 후보로도 올랐던 이장수 감독은 중국 축구 내에서 명망 있는 감독으로 우뚝 섰다. 이후 베이징 궈안, 광저우 헝다, 청두 톈청, 창춘 야타이를 거치며 중국 슈퍼리그 내 외국인 감독 중 최장수 재임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한국 내에서는 중국 시절에 비해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 하며 높은 평가를 받지 못 하지만 중국에서는 충칭과 칭다오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고 중국 축구에서 가장 성공한 명망 높은 외국인 감독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실제로 한국 내에서도 중국에서 신화를 쓴 이장수 감독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이장수 감독으로부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았고, 로케이션 후보지인 충칭 쪽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비록 시나리오 문제로 흐지부지됐지만, 이장수 감독이 중국에서 만들어 낸 신화는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왕좌를 차지한, 마치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경과 고난의 시기를 겪고 있는 독자 여러분이 계실지도 있다. 그런 당신에게 이장수 감독과 같이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길. 그리고 그 영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되길. 필자는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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