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를 기억하는가. 아마 전 국민이 그리 좋지 못한 기억을 가졌을 것이다. 러시아와 1-1로 비기며 국민들 사이에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지만 그것도 잠시, 이어진 알제리 전에서 졸전 끝에 2-4 대패를 기록하며 여러 선수들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상당히 악화됐는데, 현재 가와사키 프론탈레의 든든한 No.1 골리이자 J리그 내에서 최고의 골키퍼이지만 당시에는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던 정성룡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가오는 벨기에전 홍명보 감독이 선택한 골키퍼는 정성룡이 아닌 김승규였다. 비록 1-0 패배를 기록하며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해 대한민국 대표팀은 일찍 짐을 싸야 했지만 수문장이었던 김승규는 손가락 부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전 침착하고 안정적인 경기력과 실점 위기를 넘기는 결정적인 선방을 보여주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차세대 No.1 골키퍼로 전 국민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울산 현대의 조현우와 함께 2021년 현재까지도 김승규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골키퍼로 맹활약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김승규하면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한민국 대표팀 경기를 자주 보는 팬들이라면 '김승규는 빌드업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것이다. 당장 김승규 빌드업을 검색하면 김승규 이름 옆에 빌드업이란 단어를 붙인 기사나 영상이 상당히 많을 정도로 김승규하면 빌드업이란 이미지가 상당히 강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난 4월 前 산프레체 히로시마 골키퍼 코치 사와무라 키미야스가 J1리그 20개 구단 골키퍼를 평가하는 일환으로 <풋볼채널>에 글을 올리면서 김승규를 평가했을 때에는 이와 정반대인 평가를 냈다.
김승규는 가시와 레이솔 네우시뉴 감독이 가장 신뢰하는 골키퍼다. 비셀 고베를 떠나 한국(울산 현대)에 돌아와 정신적으로 좋지 않은 시절이 있었지만 믿을 수 있는 감독과 다시 뛰면서 정신적으로도 안정적인 플레이를 볼 수 있게 됐다.
다만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까지 뛰쳐나가 (상대방의 볼을) 가로채기를 할 수 있는가 하면, 그 정도로 기동력은 없고 슛 스톱 타입으로 발 밑 플레이는 서투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들어본 김승규에 대한 평가는 발 밑 플레이, 즉 빌드업에 강점을 가진 골키퍼인데, 오히려 일본인 골키퍼 코치의 눈으로 바라본 김승규는 선방 능력을 좋게 평가하고 반대로 빌드업 능력이 그에 비해 서투르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실제로 키미야스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김승규에 대해선 빌드업보단 선방 능력을 더 높게 쳐 준다. 실제로 J리그 중계권을 보유한 DAZN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김승규의 플레이 스타일 항목 중 장점을 '긴 손발을 활용한 슈팅 세이브가 강점이다. 마지막까지 상대의 움직임과 볼을 주시해 가까운 거리에서 슛을 해도 확실히 반응해 골문을 지킨다.'라고 소개할 정도니 말이다.
실제로 J리그 입성 전까지 김승규는 지금과 다르게 선방으로 이름을 알렸다. 국내 탑급인 순발력과 반사 신경, 페널티킥 선방으로 까다로운 헤더 슛이나 근접 슈팅을 막아내는 능력과 슈퍼 세이브가 일품인 키퍼로 평가받은 김승규는 선방 능력에 비해 발밑 플레이 부분에선 킥 미스와 같은 약점들이 부각되며 단점으로 지적받았다.
빌드업에서 약점을 드러냈던 이런 김승규에게 은사와도 같은 코치가 나타났으니, 바로 비셀 고베에 소속되어 있던 당시 골키퍼 코치로 인연을 맺었던 알렉스(Alexandro Fernandes Gregorio)였다. 알렉스는 브라질 세리A 명문 구단 SC 코린치안스에서 골키퍼 코치로 일하던 시절 훗날 AC 밀란의 골문을 지키게 되는 지다를 코칭한 적 있는 경력을 가졌다. 당시 김승규는 인터뷰에서 한국에선 빌드업 플레이를 중시하는 축구를 많이 경험해본 적이 없고 자연스레 빌드업과 관련한 훈련 또한 많이 받아보지 못했지만 알렉스 코치 아래에서 전문적인 골키퍼 훈련과 골키퍼 빌드업 훈련을 받아 빌드업 플레이가 향상됐다고 이야기했다.
알렉스 골키퍼 코치의 코칭 덕분이었을까? 김승규는 고베 입단 전보다 킥과 볼 컨트롤 능력이 눈에 띄게 향상된 모습을 보였고 자연스레 공격 작업에서도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상대 공격수의 압박이 강하게 들어와도 침착하고 여유있게 볼을 다룬 후 필드 플레이어에게 정확하게 전해주며 라인을 많이 올릴 때 수비의 뒷 공간을 넓게 커버하는 스위퍼 플레이도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덤이다.
현대 축구에서 축구인이라든지 축구팬이라든지 마르고 닳도록 언급하는 축구 용어 중 하나가 공격 작업, 즉 빌드업이라고 필자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전까지 필드 내 공격 작업은 공격수내지 미드필더가 주로 참여했다면 최근엔 수비수뿐만 아니라 골문을 지키는 골키퍼까지 공격 작업에 참여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과거에는 단순히 골문 주변에 자리잡으며 상대 선수의 슈팅을 막아내는 역할만 하면 충분했지만 이젠 상대방이 뒷공간을 파고들 때 재빨리 페널티 박스 안이나 밖으로 뛰어나가 공을 걷어낼뿐만 아니라 공을 전방의 동료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거나 아예 공을 가지고 전방으로 드리블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목격하고 있다. 그만큼 이제 골키퍼도 필드 플레이어의 일부로 자리잡았다고 봐도 좋다.
김승규의 빌드업 능력 향상은 김승규 본인에게 있어서 축구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빌드업 축구를 중시하는 벤투호에서 신뢰를 받는 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김승규가 현대 축구에서 요구하는 골키퍼의 조건에 부합하는 경쟁력 있는 선수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 들어서 김승규의 스위핑 횟수가 많이 늘어난 것 또한 눈에 띈다. 상단에 있는 히트맵, 2021년과 2020년 김승규의 스탯을 비교하는 사진들이 그 증거다.
최근 경기들 중 김승규가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던 경기는 8월 21일 열렸던 사간 도스 전, 8월 25일 열렸던 도쿠시마 보르티스 전이었다. 특히 사간 도스 전에선 1-3으로 졌음에도 활발한 선방뿐만 아니라 넓은 범위의 스위핑, 많은 볼 터치와 패스를 보여주며 팀의 추가 실점 위기를 막고 수비진 중 제일 높은 평점을 부여받았다. 사간 도스 전 김승규는 하단 이미지에도 볼 수 있지만 스위퍼 키퍼와 같이 과감하게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까지 나오며 상대의 공격 찬스를 끊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김승규의 이번 시즌 경기 당 러닝 아웃 스탯은 (골키퍼가 페널티 박스 바깥까지 뛰어나가 처리한 볼) 1.2회(성공률 100%)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J리그 주전 골키퍼 중 1위로 김승규와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는 사간 도스 박일규와 비슷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2021년과 2020년 김승규의 스탯을 비교해보면 볼 탈취와 수비 수치가 작년보다 상당히 상승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상단 사진에는 없지만,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 볼 캐치율 또한 57.7%로 리그 7위를 기록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대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2021 시즌 김승규 본인의 진가를 드러낸 경기는 바로 24라운드 J1리그 1위를 달리며 일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가와사키 프론탈레와의 경기다. 김승규는 이 날 본인의 장점인 선방 능력을 뽐내며 본인의 2021 시즌 인생 경기를 펼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날 11경기 만에 클린시트를 기록하며 MOM을 받은 김승규는 스프린트(시속 24km, 초속 7m를 기록한 횟수)부분에선 기존보단 낮았지만 주행 거리 부분(4.866km)에는 오히려 가시와 내 일부 다른 필드 플레이어보다 많이 뛴 모습을 보이며 좋은 선방뿐만 아니라 활발히 움직여주며 1위 가와사키를 상대로 팀의 귀중한 승점 1점 획득에 큰 공을 세웠다.
위 장면처럼 상대팀의 공간을 향해 패스하는 것이나 애매하게 경합이 붙을 수 있는 볼은 김승규 본인이 직접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나와서 차단해내며 위험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는 이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승규의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에서 수비에 가담하는 성향은 볼이 애매한 위치에 있어 수비에 변수가 되는 경우에 수비의 부담을 줄여주며 수비 상황에서 좋은 플레이가 될 수 있다.
이제 김승규는 단순히 발밑 플레이뿐만 아니라 최종 수비수라 불리는 스위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골키퍼로서 팀의 수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플레이는 도박과도 같으며 도박에 실패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만약 김승규가 공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에 있는데 상대팀 공격수의 압박이 성공해 볼 소유권을 빼앗기거나 상대팀의 볼 소유권을 탈취하기 위해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으로 달려가다 탈취에 실패하면 골키퍼가 있어야 할 골대가 텅텅 비어버려 그대로 실점 위기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과감한 모험을 하는 만큼, 그 책임도 고스란히 본인이 가져가는 셈.
상대팀 선수가 찬 공의 궤적을 확인하기 전에 상대방의 킥 모션만 보고 튀어나가는 판단 미스를 보이면 골대가 빈 것을 알아차린 상대팀 선수가 슛을 날릴 때 속수무책이 된다는 것.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 경기가 바로 지난 18일 홈에서 열린 산프레체 히로시마전이었다.
상단 이미지는 산프레체 히로시마 전 가시와 레이솔의 2번째 실점 장면이다. 왼발로 준 에지퀴엘의 패스를 도글라스 비에이라가 받은 상황. 김승규는 볼이 뒷 공간으로 길게 떨어지거나 도글라스 비에이라가 김승규가 있는 전방으로 달려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오히려 볼이 예상했던 것보다 짧게 떨어지고 도글라스 비에이라가 전방으로 달려들지 않고 돌면서 김승규의 판단은 미스가 되고 말았다. 김승규가 다급하게 페널티 박스 안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가시와의 골대가 빈 것을 확인한 도글라스 비에이라가 재빨리 먼 거리에서 슛을 했고 이 볼이 가시와의 골망 안으로 들어가면서 결국 추가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처럼 판단 미스로 실수를 해버리면 스스로 변수를 만들어버리고 오히려 수비에 부담을 준다.
아무래도 김승규는 나오는 판단 자체는 좋지만 김승규도 사람이다보니 판단 미스를 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말했듯 일본 현지에서 김승규는 발밑 컨트롤 능력이 그 정도로 뛰어난 편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이런 플레이를 하면 자연스레 위험성도 높아지는 편이다. 흔히 국내 커뮤니티에 김승규 실수라는 제목과 함께 움짤이 올라오면 대부분 이런 플레이로 인해 발생하는 실수다.
다만 실수 부분이 국내에서 너무 부각되다 보니, 김승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김승규의 실력까지 저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당장 김승규는 리그 내에서 스위핑을 자주 보여주는 선수이지만 예상 외로 많은 스위핑에 비해 실수는 적은 편. 또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방 능력에 풍부한 J리그 경험, 발전하는 스위핑은 김승규가 가지고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김승규 외에 경험이 많이 없는 골키퍼(타키모토 하루히코, 마츠모토 켄타, 콘노 카츠히로, 사사키 마사토)가 많은 가시와 내에선 대체 불가능한 존재.
현대 축구에서 스위퍼 키퍼의 상징과도 같은 바이에른 뮌헨의 마누엘 노이어나 맨체스터 시티의 에데르송 또한 빌드업 플레이에 능함에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시가 에데르송은 2019-20시즌 맨체스터 더비 올드 트래포드 0-2 패배 당시 2번째 실점 장면, 노이어는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한국전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스위퍼 키퍼도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는 만큼, 김승규의 플레이 스타일 상 아쉬운 모습은 보여줄 수 있어도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초반 김승규는 팀의 부진과 함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후 시간이 지나고 김승규의 폼이 올라오면서 자연스레 가시와 레이솔도 좋은 성적을 기록해 강등권 탈출에 성공하면서 중위권까지 순위를 상승시켰다. 하지만 최근 산프레체 히로시마-감바 오사카 2연전에서 김승규 본인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도 2연패를 기록하고 있다. 다만 10월 2일 베갈타 센다이 전에서 다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만큼, 반등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흔히 경험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골키퍼 포지션에서 30대부터 기량 부분에서 물이 오른 시기로 여겨진다. 즉, 선수마다 다르지만 골키퍼에게 있어 30대는 전성기에 접어드는 나이인 셈. 9월 30일 생일인 김승규는 이제 31세가 되며 이제 30대에 본격적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골키퍼의 전성기라 불리는 30대에 접어든 김승규. 과연 김승규의 30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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