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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호날두, 벤제마, 캉테 영입에 이어 메시까지 노렸던 사우디 인베이전, 사상누각일까? 혁명일까?

by 뚜따전 202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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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도르 위너 벤제마의 다음 행선지는 알 이티하드였다. © 알 이티하드

한국 시간으로 2023년 6월 7일 아침, 레알 마드리드를 떠난 카림 벤제마가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 알 이티하드에 입단했다. 지난 2022년 12월 30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알 나스르에 입단한 이후 또 다른 빅네임 영입이다. 여기에 첼시 소속 은골로 캉테의 알 이티하드 합류 Here We Go Soon을 언급하며 사우디 아라비아 국부 펀드인 공공투자기금(Public Investment Fund, PIF) 대표단과 알 이티하드 이사회가 캉테 에이전트와 런던에서 만남을 가지며 2025년 6월까지 시즌 당 €100M이라는 어마어마한 조건으로 합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비록 인터 마이애미에 입단했지만 올해 4월 리오넬 메시에 한화 약 1조 4천억 원과 2년 계약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여름 이적시장에서 사우디의 공격적인 행보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 여름 이적시장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와 공공투자기금. 최근 이들의 행보를 보면 1960년대 영국 유명 4인조 록 밴드 그룹 비틀즈의 방미 이후 영국의 음악과 문화가 미국을 점령한 문화 현상 '브리티시 인베이전'에서 고안한 '사우디 인베이전'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오늘은 공공투자기금과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의 대변화를 이야기하고 사우디와 같이 국가가 직접적으로 나서 축구 개혁을 시도했지만 정부에 의해 몰락한 중국 축구굴기, 과거 사우디와 같이 야심 차게 출범하며 큰돈을 썼으나 몰락해 버린 콜롬비아 엘도라도와 북미 사커 리그(North American Soccer League, NASL)와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사우디 인베이전 핵심인 공공투자기금. © Returns

우선 사우디 인베이전의 핵심, 공공투자기금에 대해 알아보자. 공공투자기금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운영하는 국부 펀드로 걸프 지역에서 쿠웨이트 투자청과 함께 가장 오래된 국부 펀드다. 운용 자산 규모는 6200억 달러(약 760조 원)로 세계에서 규모가 큰 국부 펀드 중 하나이다. 1971년 사우디 3대 국왕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내린 국왕령을 바탕으로 설립한 공공투자기금은 처음엔 지금과 같이 사우디 정부가 운영하는 글로벌 투자 기관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설립 이후 수십 년 동안 공공투자기금은 사우디 정부가 운영하는 사우디 공기업에 대한 정부 소유 지분 지주 회사 역할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공공투자기금이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 즉위 이후부터다. 기존에는 재무부에서 공공투자기금을 관리했으나 2015년 3월 각료 이사회 결정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있는 경제개발위원회(CEA) 산하로 옮기면서 공공투자기금은 국가 주관 글로벌 투자 기관으로 성장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국부 펀드로 성장했다.

미래형 첨단기술 분야 투자에 매우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공공투자기금은 소프트뱅크 비전 펀드를 비롯해 우버, 테슬라, 버진 갤럭틱, 루시드 모터스 등에 투자하며 아부다비 및 쿠웨이트에 이어 걸프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국부 펀드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상반기에는 일본 증시에 상장한 넥슨 지분 9.14%를 매입하며 2대 주주가 됐고 엔씨소프트 2대 주주(9.26%)로 자리 잡으며 두 회사에만 약 3조 원 규모 투자를 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우디 인베이전의 시발점은 공공투자기금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인수였다. 사진은 2021년 10월 7일 공공투자기금이 뉴캐슬을 인수한 후 세인트 제임스 파크 밖에서 기뻐하는 뉴캐슬 팬. © Middel East Eye

뿐만 아니라 공공투자기금은 축구계에도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축구 인베이전 시발점은 공공투자기금이 대주주로 있으면서 루벤 브라더스, 아만다 스테이블리 컨소시엄 형태로 프리미어 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것이 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공투자기금이 뉴캐슬을 인수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미 2020년에도 뉴캐슬 인수를 시도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인권 문제와 사우디 내 불법 프리미어리그 중계방송 적발 미흡(사실 이는 사우디 왕가가 아랍권 독점 프리미어리그 중계권사로 카타르 왕가와 관계가 큰 알 자지라 계열사 bein 스포츠와 극심한 마찰을 겪고 있기 때문이었다.)을 이유로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결국 2020년 7월 31일 공공투자기금은 뉴캐슬 인수에서 한 발 물러선다.

그러나 1년 후 공공투자기금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뉴캐슬 인수를 시도한다. 이번에도 불법 중계 문제와 앰네스티 및 다른 인권 단체들이 사우디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서 스포츠를 통해 이미지 세탁을 한다는 맹비난과 함께 법적 문제까지 겹치며 이번에도 인수는 쉽지 않게 흘러갔다.

다만 인수 과정에서 불거진 핵심 논쟁거리였던 사우디 자국 내 프리미어리그 불법 중계 문제를 사우디가 카타르 비인 스포츠와 협상에 성공하며 해결하고,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이 공공투자기금의 뉴캐슬 운영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보증을 받아낸 이후 인수를 승인하게 되면서 2021년 10월 7일 (현지 시간)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공공투자기금
에 3억 500만 파운드(한화 약 4953억 5000만 원)에 매각하며 공공투자기금이 드디어 축구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마이크 애슐리의 경영으로 고통받던 뉴캐슬 팬들은 세인트 제임스 파크 앞에서 뉴캐슬 유니폼을 입고 아랍풍 전통 의상을 쓸 정도로 크게 기뻐했다.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공공투자기금의 뉴캐슬 인수는 성공적이었다. 공공투자기금의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에 힘입어 인수 전 전망이 어두웠던 뉴캐슬은 오랜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성공한다. 단순하게 본다면 맨시티에 이어 걸프 자본이 프리미어리그에 들어오며 한 명문팀을 부활시킨 또 다른 신화에 불과했지만 이것이 사우디 인베이전의 서막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알 나스르에 입단한 호날두.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가 세계에서 4~5번째로 치열한 리그가 될 것이라고 했던 호날두의 발언은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대로 간다면 우스갯소리가 아닐 수 있다. © Jagran English

사우디 인베이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022년 12월 호날두 알 나스르 입단을 시작으로 사우디 자본의 건재함을 알렸고 뒤이어 여름 이적시장에서 알 이티하드의 벤제마와 캉테 영입과 알 나스르 자하 영입설, 알 힐랄 메시 영입설, 여기에 2024년 계약 종료 후 손흥민 영입 루머까지 사우디는 여름 이적시장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다.

여기에 2023년 6월 5일 공공투자기금 공식 트위터를 통해 스포츠클럽 투자 및 민영화 프로젝트 일환으로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 소속 알 힐랄 SFC, 알 나스르 FC, 알 이티하드 FC, 알 아흘리 SFC를 모두 인수했음을 공공투자기금 공식 SNS를 통해 발표했다. 각 구단 지분 75%를 인수하였고 25%는 비영리 단체 몫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제시한 비전 2030의 일환으로 스포츠 구단들에 대한 기업 및 기관의 투자를 허용하고 일부 구단들을 민영화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여기에 2023년 4분기부터 사우디 내 여러 축구단을 민영화하고 장기적으로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를 세계 10대 리그로 성장시키며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의 수익을 연간 4억 5천만 리얄에서 18억 리얄 이상으로 증가시키는 장기적인 플랜을 공개하며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를 세계적인 리그로 성장시키면서 유럽 리그 못지않은 큰 수익을 얻으려는 비전을 드러냈다.

단순히 이적시장 큰 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우디는 대표팀 성장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벤제마와 캉테 영입 충격이 가시기도 전인 6월 초,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대표팀이 오는 2024년 6월 14일부터 한 달 동안 미국에서 열리는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집트, 그리스와 함께 2030 FIFA 월드컵 공동 유치까지 추진하며 축구계에서 많은 투자와 국제적인 참여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우디 인베이전은 끝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사우디 비전 2030 추진이라는 중점 과제를 바탕으로 스포츠, 특히 축구 부문 투자 사업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소프트 파워를 강화하고자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축구계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사우디의 국제적 평판을 개선하고, 미국이나 영국 등 우호국 간 관계도 기존 석유와 군사 이외에 스포츠 부문으로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공공투자기금의 적극적인 행보는 단순한 경제적 목적을 넘어서 정치적인 목적도 있음을 알 수 있다.

2010년대 세계 축구를 뒤흔든 중국의 축구굴기. 정부 주도 하에 시행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정부 때문에 축구굴기는 실패한다. © KBS 세계는 지금

그렇다면 사우디 인베이전 이전 유럽 외 대륙에서 자금을 바탕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무엇이 있었을까? 필자는 축구굴기, NASL, 콜롬비아 엘도라도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2010년대 시진핑 주석 하에 적극적으로 시행했던 축구굴기는 한때 유럽 무대와 남미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을 거액으로 영입하며 세계 축구를 놀라게 했다. 이에 여러 언론에서도 축구굴기를 비중 있게 다루며 축구굴기는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축구굴기는 달콤했던 2010년대를 지나 2020년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기업 재정 악화로 2021년 2020 시즌 중국 슈퍼리그 우승팀 장쑤 쑤닝 해체를 시작으로 슈퍼리그, 갑급, 을급리그 구단들이 상당수가 해체했고 2021년 헝다그룹 파산 위기로 2010년대 축구굴기를 상징하는 구단으로 자리 잡았던 광저우 헝다(광저우 FC)까지 재정난을 버티지 못하고 갑급리그로 강등하며 실패한다.

중국 슈퍼리그를 아시아 1류 수준 프로축구 리그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는 2010년대에는 그럴듯하게 흘러갔으나 2020년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생긴 중국 내 격리 기간 문제로 여러 해 AFC 챔피언스리그에 불참하며 리그 포인트가 급락했고 모기업 사정이 열악해지며 여러 팀이 해체하자 정상적인 리그 운영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남자 대표팀 아시아 선두 실력 확보라는 목표도 여전히 아시아 예선에서 고배를 마시며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고 장기적 목표인 월드컵 개최마저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중국이 시행한 축구굴기는 중국 슈퍼리그의 일시적인 성적 향상과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도움이 됐지만, 뿌린 돈에 비해 인프라 투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초다. 중국 정부 측에서도 지속적으로 구단 재정 건전화 방안, 그리고 샐러리캡 도입을 추진하며 이를 개선하려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헝다그룹 파산 위기로 이어진 부동산 기업 재정 악화가 중국 축구에 큰 위기를 불러온다. 이는 중국 축구단 상당수가 모기업이 부동산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축구를 발목 잡은 고질적인 문제점이 있었으니 바로 비리였다. 최근 리톄 감독이 비리 혐의로 구속됐고 친셩, 쑨시린, 주젠룬, 진징다오와 산둥 루넝 감독 하오웨이, 천쉬위안 중국축구협회장까지 연루된 승부조작 사건. 신뢰를 잃었고 승부조작 사건은 아직 혐의일 뿐 몰락하는 슈퍼리그에 쐐기를 박을 가능성이 높다. 부정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 재탄생한 슈퍼리그가 아이러니하게도 부정부패로 위기를 겪는 셈이다.

NASL 흥행의 기폭제 역할을 한 축구 황제 펠레. © 뉴욕 코스모스

다음으로 NASL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북미 TV 시청자가 백만 명 이상이라는 충격적인 결과에 미국 스포츠 사업가들이 놀랐고, 축구에 관심 없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있던 미국 무대는 새로운 축구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블루오션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1966년 설립한 유나이티드 사커 어소시에이션(United Soccer Association, USA)과 내셔널 프로페셔널 사커 리그(National Professional Soccer League, NPSL)가 1967년 12월 7일 합쳐지며 실질적인 미국 최초 프로 축구 리그인 NASL이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NASL이 무엇보다 독특했던 점은 기존의 축구 규정과는 다른 NASL만의 독자적인 축구 규정을 적용한 것이었다. 미식축구와 아이스하키에 길들여진 미국인들의 취향을 따라가기 위해 경기는 정확히 전, 후반 각각 45분에 즉시 끝났으며, 기존 축구보다는 미식축구와 아이스하키에 가까운 독자적인 오프사이드 룰을 채택했다. 또한 무승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정규시간 내에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을 경우 페널티 라인 바깥까지 골문을 튀어나와 킥을 막아내는 아이스하키식 페널티 슛아웃을 도입했다. 이밖에도 승리 승점 2점, 무승부 1점 승점제가 아닌 승리 6점, 무승부 3점 승점제에 넣은 골 수에 따라 승점을 따로 더 주었다. 이 밖에도 유럽식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의 플레이오프가 아닌 3전 2선승제 미국식 플레이오프 제도를 도입해 리그에서 최초로 골든골 제도를 도입하는 등 미국인들에게 축구가 친숙하게 느껴지게끔 만들어 미국 내 축구를 흥행시키기 위한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많이 했다.

이런 노력에 빛을 발했던 것일까? NASL 평균 관중 수는 출범 첫 해 2930명에서 1974년 7770명으로 늘어나 NASL은 흥행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했고 신생팀도 많이 창단하는 등 리그 규모도 커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NASL 흥행에 있어 결정적 요인은 1975년 펠레가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한 이후다. 펠레가 NASL에 진출한 이후 에우제비우, 조지 베스트,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요한 크라위프 등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NASL에 입성하며 NASL은 별들의 전쟁터로 성장한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스타플레이어들을 너무 많이 영입하는 바람에 미국, 캐나다 선수들은 리그에 외국인 제한규정이 아닌 내국인 의무 선발 규정이 있었을 만큼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며 자국 축구 발전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결국 1980년 이후 리그 참여 팀 중 재정난에 시달리는 팀이 나오기 시작했고, 과한 선수 몸값 지출과 이에 비례하지 않는 리그 수입으로 인해 1981년 3팀 해체, 1982년 7팀 해체, 1983년 2팀 해체, 1984년 3팀 해체로 마지막 시즌은 겨우 9팀만 참가하는 작은 리그로 바뀐다. 결국 구단주들은 투자 의욕을 잃었고 기초도 부실하고 자본도 모두 잃어버린 NASL은 1984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콜롬비아 축구 엘도라도를 풍자한 Onkar Shirsekar의 그림. 엘도라도는 그저 콜롬비아 보수당의 놀이터에 불과했다. © Football Paradaise

이어 설명할 사례는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의 엘도라도 시절이다. 여기서 엘도라도는 과거 대항해시대 당시 남아메리카로 향한 스페인 정복자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전설적인 장소로 도시 전체가 금으로 도배한 거대 도시이며 황금이 넘쳐나는 이상향으로 여겨지는 장소로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의 전성기가 황금으로 뒤덮인 엘도라도와도 같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콜롬비아는 이전부터 보수당과 자유당 간 갈등이 심했다. 1946년 여당이었던 자유당 정부가 온건파, 급진파로 갈라지며 혼란스러운 와중에 보수당에게 정권을 넘겼고 1948년 4월 9일에는 급진파 상징과도 같았던 호르헤 엘리세르 가이탄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 보고타의 히메네스 데 케사다 거리를 걷던 도중 후안 로아 시에라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자유당과 보수당 간 갈등이 깊어지며 전국적으로 폭동 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콜롬비아 정부는 콜롬비아 내 혼란을 무마시키고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콜롬비아 역사상 최초로 전국 프로 리그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마리아노 오스피나 페레스 대통령은 당시 본인을 지지하던 부자 구단주들을 설득시켜 콜롬비아 프로 리그 투자를 유도했다. 하지만 당시 리그를 운영했던 기구 디마요르(DIMAYOR, División Mayor del Fútbol Profesional Colombiano)와 정부 간 갈등이 있었고 결국 디마요르가 콜롬비아 축구협회와 갈라서자 FIFA 집행위원회는 콜롬비아 축구협회를 FIFA에서 퇴출시키며 모든 국제 대회에서 콜롬비아 대표팀과 프로팀의 참가를 막았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콜롬비아 축구에 있어 전화위복이 된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위기로 인해 급여를 제때 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미요나리오스 회장 알폰소 시니어 케베도(Alfonso Senior Quevedo)는 콜롬비아 리그가 FIFA에 미가입했기 때문에 선수 영입 시 이적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적극 활용해 투입하지 않은 이적료를 전부 선수 연봉으로 제시했다. 콜롬비아에서 제시한 엄청난 연봉은 급료가 밀린 스타플레이어들을 유혹했다. 결국 1949년 6월 8일 아르헨티나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던 라 마퀴냐(La Máquina) 일원 아돌포 페데르네라를 시작으로 남미 축구 스타뿐만 아니라 영국,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출신 유럽 축구 선수들도 콜롬비아로 향하며 정치적 이슈로 콜롬비아 리그는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한다.

하지만 엘도라도가 무너진 이유도 역시 정치였다. 장시간 이어진 정치 갈등으로 인해 무려 18만 명이 사망하자 1953년 콜롬비아 군부, 자유당과 보수당 온건파들이 일어나 쿠데타를 일으키며 보수당 내 강경파 대통령인 라우레아노 고메즈 대통령을 축출시킨 후 자유당과 협정을 맺었다. 이로 인해 엘도라도를 후원하던 보수당 강경파가 몰락하고 FIFA에서도 엘도라도를 끝내기 위해 압박과 회유를 하자 결국 엘도라도는 파국을 맞는다.

엘도라도로 불리며 황금기를 맞이했던 콜롬비아 리그였지만 현실은 속 빈 강정같이 부실했다. 콜롬비아 리그는 보수당 정부가 운영하는 놀이터에 불과했다. 마치 전두환 정부가 추진한 3S 정책이 떠오를 정도로 다분히 정치적이고 대중들의 눈을 돌리기에 불과한 용도였을 뿐이다. 이러니 콜롬비아 자국 선수 성장, 유소년 시스템 같은 기반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당연히 부실했다. 이런 비상식적인 체계가 가져온 결과는 파국이었고 전성기를 길게 이어지지 못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마치 제목은 희망적이지만, 가사는 엘도라도 전설을 듣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에서 벌이는 약탈과 살육의 참상을 담은 독일 레게팝 밴드 Goombay Dance Band의 'El Dorado'노래처럼 콜롬비아 엘도라도는 처참하게 몰락했다.

결론적으로 축구굴기, NASL, 엘도라도가 사우디 인베이전에게 주는 교훈은 정부가 지나친 개입을 자제하고 모기업이나 정부 지원에 의존하면서 갑작스럽게 많은 돈을 유명 외국인 선수에게 주로 쓰면서 단기간 성적에 연연하기보다 장기적으로 바라보며 내실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는 점이다. 천문학적인 돈을 풀면서도 기업 투자 제한을 풀고 축구계에서 적극적인 행보는 분명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나 왕세자로서 기존 관념을 깨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던 빈 살만을 보면 더욱 향후 행보에 주목하게 만든다. 다만 사우디 인베이전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사우디 내 인권 문제를 스포츠를 활용해 시선을 돌린다는 비판으로 인해 생기는 공공투자기금의 평판 하락, 또 장기적으로 이 기세를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프로젝트도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변수가 생기고 실패하는 모습을 자주 봤기 때문이다. 과연 공공투자기금이 이끄는 사우디 인베이전은 사상누각으로 남을까, 축구계에 혁신을 불러오며 큰 영향을 미치는 거대 자본으로 남을까.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가 세계에서 4~5번째로 치열한 리그가 될 것이라고 했던 호날두의 발언이 미래에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공공투자기금이 앞으로 보일 행보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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