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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 Google Bard인데 K리그 40년 역사상 최고의 선수 순위 매겼다

by 뚜따전 202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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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AI에서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는 단순히 대화하는 것이 아닌 교육, 번역, 작문, 코딩까지 활용할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다. 동시에 대화형 인공지능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쟁점으로 자리 잡았고 ChatGPT가 성공하자 타 회사에서도 대화형 인공지능을 출시할 정도로 대화형 인공지능은 2023년 전 세계를 흔든 폭풍이었다.

문득 필자는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평가하는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누구일까. 마침 지난 해가 K리그 40주년이니 글을 작성해보고자 했다.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생각을 곧 실행으로 옮겨 대화형 인공지능 중 유명한 ChatGPT, Bing AI, Google Bard를 모두 사용했다. 세 인공지능에게 똑같은 질문을 작성했다.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을 1위부터 10위까지 순위를 매겨줘.

 
필자는 세 인공지능이 작성한 답변을 비교해 보았다. 너무 터무니없는 답을 그대로 글에 가져다 쓰기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독자들도 거부감이 들 테고. 그렇기에 구글 검색 엔진을 기반으로 하는 대화형 인공지능 Google Bard가 내린 평가를 선택하기로 했다. 검색 엔진이 세계 최고 수준인 구글에서 만든 인공지능답게 정확도도 그나마 셋 중에서 낫다. 그렇다면 Google Bard가 평가한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선수 10명은 누구일까?
 
* 앞서 이야기한 AI 3개 중에서 Google Bard는 그나마 정확성이 있는 편이어서 선택했다. 그러나 Google Bard가 순위를 매기는 과정에서 작성한 선정 이유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틀린 내용은 필자가 Google Bard가 쓴 선정 이유에 이탤릭체로 바로잡도록 하겠다.
* 필자가 작성한 선수 코멘트는 최대한 K리그 위주로 작성했다.

10위: 유상철

© 일간스포츠
K리그 통산 301경기 출전, K리그 베스트 11 5회 등 K리그를 대표하는 미드필더였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K리그 통산 142경기 출장, K리그 베스트 11 3회 수상)
- Google Bard

 
김주성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 유상철은 김주성과 함께 K리그에서도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로 모두 베스트 11에 뽑혔다. 데뷔 초에 특히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면서 득점왕까지 했을 정도. 이 정도 수준의 유틸리티 플레이어는 한국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하다. 탁월한 체력과 축구 지능, 적절한 위치 선정과 활발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포지션 소화도, 득점왕을 차지했을 정도로 날카로웠던 결정력, 수비력, 공중볼 경합, 투쟁심, 황혼기까지 국가대표에 뛸 정도로 철저했던 자기 관리까지. 유상철은 단순히 걸출한 선수가 아닌 만능 축구선수로 한국판 뤼트 휠릿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K리그에서는 울산 현대에서만 뛰며 울산 현대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레전드.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해 1996년, 2005년 리그 우승을 경험하고 1994년과 1998년에는 리그 베스트에 들었고 특히 1998년에는 K리그 득점왕 타이틀도 차지했다. 1994년에는 수비수로, 1998년에는 미드필더로, 2002년에는 공격수로 베스트 11에 오르는 위엄까지 보이며 자신의 천재성을 K리그에서도 보여줬다. 2013년에는 K리그 30주년 기념 레전드 베스트 11과 일간스포츠 선정 K리그 40주년 베스트 11에 뽑혔다.

9위: 홍명보

© 스포츠경향
K리그 통산 121경기 출전, K리그 베스트 11 6회 등 K리그를 대표하는 수비수였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K리그 통산 156경기 출전, K리그 베스트 11 5회)
- Google Bard

영원한 리베로. 김민재 이전 아시아를 대표하는 수비수를 묻는다면 상당수가 홍명보를 고를 것이다. 탈아시아급 플레이 메이킹, 커버 능력, 탁월한 예측력, 뛰어난 수비 지능을 바탕으로 본인의 단점을 상쇄했다. 프로 입단 이전부터 촉망받는 선수였던 홍명보는 상무를 거쳐 1992년 포항에 입단한다. 입단 첫 시즌부터 맹활약한 홍명보는 포항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시즌 활약을 인정받아 홍명보는 프로 입단 첫 해부터 베스트 일레븐, MVP를 석권했다.
 
홍명보는 커리어 도중 J리그에 진출하기도 했고 국가대표팀에 자주 뽑히며 포항에서 많이 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K리그 통산 156경기 14골 8도움) 좋은 활약상을 보여주며 베스트 11 5회 (1992년, 1994년, 1995, 1996년, 2002년), 리그 MVP를 수상했다. 국가대표, J리그라는 핸디캡이 있었음에도 선수 홍명보가 K리그에 끼친 영향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지표. 은퇴 이후에는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1, 일간스포츠 선정 K리그 40주년 베스트 11, K리그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K리그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 6인 중 2세대 선수 부문에 뽑혔다.

8위: 신의손

© 풋볼리스트
K리그 통산 120경기 출전, K리그 MVP 1회, K리그 베스트 11 7회 등 K리그를 대표하는 골키퍼였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월드컵은커녕 한국 대표팀에서 뽑힌 적이 없다. K리그 통산 320경기에 출장했으며 K리그 수상은 K리그 베스트 11 6회다.)
- Google Bard

K리그 역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선수. 타지키스탄 출신으로 소비에트 톱 리그(Высшая лига СССР по футболу)에서 군계일학이었던 신의손이었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일화 천마에 입단하며 한국 땅을 밟는다. 일화 골문을 지키는 신의손의 퍼포먼스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신의손이 없던 지난 시즌 일화는 리그 최다 실점 팀이었다. 그런데 신의손이 일화에 오니 리그 최소 실점 팀으로 바뀌었던 것, 이때 뒷날 그의 이름이 되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의손의 맹활약에 큰 충격을 받은 K리그 팀들은 골키퍼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며 K리그 외국인 골키퍼 붐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한국인 골키퍼가 외면받았다. 보다 못한 연맹이 한국인 골키퍼 육성을 이유로 1997년 전체 경기 2/3 출전, 1998년 전체 경기 1/3 출전, 1999년 출전 금지로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며 외국인 골키퍼 기을 금지했다. 신의손이 K리그 규정을 바꾼 셈. 이 때문에 사리체프는 한국을 떠나야 했지만 2000년 귀화 시험을 통과하며 공식적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후 안양 LG 치타스에 입단해 동계 훈련에는 10일 밖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K리그, 리그컵,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아시안 슈퍼컵, 아프로-아시안 클럽 챔피언십까지 일화 왕조 시절 일화의 골문을 든든히 지켰던 신의손은 K리그 베스트 11 6회 수상, K리그 수비상, K리그 30주년 베스트 11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축구인들에게 골키퍼가 중요한 이유를 일깨워준 레전드 선수로 K리그 역사에 남았다.

7위: 차두리

© 뉴스토마토
K리그 통산 득점 6위(125골), K리그 MVP 1회, K리그 득점왕 1회 등 K리그를 대표하는 수비수였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K리그 득점은 2골에 불과하다. 아마 정조국 기록을 잘못 갖고 온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국의 K리그 통산 득점 수는 121골이다.)
- Google Bard 

우리에게는 차범근의 아들로 유명한 선수. 아버지인 차범근의 뒤를 이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축구선수 커리어를 시작했다. 레버쿠젠,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등 분데스리가에서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셀틱에서 뛰다가 2013년 K리그 클래식 FC 서울로 이적해 2015년 10월 31일 FA컵 우승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어찌 보면 선수 생활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내고 K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셈. K리그에서 뛴 기간이 3시즌에 불과하기 때문에 차두리를 Top 10에 두는 것은 Google Bard의 판단 미스.
 
차두리 하면 떠오르는 것은 강인한 피지컬과 몸싸움,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직선적인 돌파력이다. 처음에는 스트라이커로 시작했지만 윙 포워드, 윙어를 거쳐 윙백과 풀백으로 전향했다. 공격 능력과 압박이 덜한 후방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다 보니 본인의 장점은 살리면서 단점을 상쇄하는 효과를 냈다. 사이드백이 측면 공격에 가담하는 지침이 대세로 자리 잡자 차두리의 진가는 가치가 높아졌다. FC 서울로 이적해 K리그 무대를 밟으며 계속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2015년 아시안컵에서 사이드백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 

6위: 김신욱

© 경인일보
K리그 통산 득점 5위(132골), K리그 MVP 1회, K리그 득점왕 2회 등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였습니다. 2010년대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활약하며 울산 현대와 전북 현대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K리그 통산 득점 4위. K리그 득점왕 1회 수상.)
- Google Bard

K리그 통산 득점 순위 4위를 기록하고 있는 김신욱은 2010년대를 대표했던 공격수다. 큰 키를 바탕으로 공중볼을 잘 따내지만 상대 수비들의 체력을 빼주며 뒷공간을 흔들고 2선 공격수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타겟형 스트라이커와는 거리가 있다. 피지컬보다 기술로 승부를 보 미리 공의 낙하지점을 포착하고 압도적인 제공권으로 빠르게 슈팅 타이밍을 만들어내는 스트라이커. 이 때문에 한때 김신욱 활용법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을 정도로 김신욱 활용에 대한 논의는 뜨거웠다.
 
울산 현대에서 2011년 K리그컵 득점왕을 시작으로 2012년 울산이 AFC 챔피언스 리그에 우승하는데 기여하며 본인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2013년 베스트 11과 MVP, 팬타스틱 플레이어를 기점으로 2015년 아드리아노를 제치고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다. 울산 현대 역대 출전 3위, 득점 2위를 기록했지만 전북 현대 이적 과정에서 잡음을 일으키며 울산팬들의 미움을 산다. 이후 전북에서 이적 초기 이동국, 에두와 원톱 자리를 두고 로테이션을 돌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전 기회가 적어지고 골 수 또한 적어졌다. 하지만 2017년부터 2018년 2년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고 2018년 AFC 챔피언스 리그 베스트 팀에 뽑히며 전북 현대 톱으로서 활약하기 시작한다. 2019년 체지방 감량이 빛을 발해 17경기 9골을 기록하며 득점왕 페이스와 국가대표 승선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페이스를 보였지만 시즌 중 상하이 선화로 이적하며 김신욱의 K리그 생활은 잠시 멈추었다.

5위: 데얀

© 뉴스토마토
K리그 통산 득점 2위(189골), K리그 MVP 1회, K리그 득점왕 5회 등 K리그를 대표하는 외국인 선수였습니다. 2000년대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활약하며 전북 현대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실제 K리그 득점왕은 3회였다. 2010년대 초반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활약하며 전북 현대가 아닌 FC 서울 전성기를 이끌었다.)
- Google Bard

K리그 역대 외국인 선수 출전 1위, 외국인 선수 득점 1위, K리그 통산 득점 2위, 유일 3연속 득점왕, 역대 최다 득점왕, AFC 챔피언스 리그 역대 득점 1위 기록을 보유한 레전드. 탁월했던 외국인 선수를 떠나 명실상부 K리그 역사상 최고라 부를 수 있는 레전드다. 타고난 골 감각으로 침착함과 어느 자세에서든 골로 연결할 수 있는 탁월한 슈팅 능력과 슈팅 타이밍, 골 결정력에서 강점을 보였다. 2007년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며 한국과 인연을 처음 맺은 데얀은 첫 시즌 14골을 넣으며 K리그 득점 3위를 차지했고 2008년 FC 서울에 입단한 이후 K리그 3연속 득점왕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특히 몰리나와 함께 2010년대 초반 FC 서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데몰리션 듀오는 임팩트가 커 아직까지 K리그 팬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비록 2018년 라이벌 수원으로 이적해 FC 서울 팬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며 금지어로 전락했지만 데얀이 FC 서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FC 서울 시절 K리그 3회 우승, 3시즌 연속 득점왕(2011년~2013년), K리그 베스트 11에 4회 연속(2010년~2013년), K리그 팬타스틱 플레이어(2012년)를 수상하며 2010년대 FC 서울을 대표하는 외국인 스트라이커로 맹활약했다.
 

4위: 김주성

© 일간스포츠
K리그 통산 득점 10위(126골), K리그 MVP 1회, K리그 득점왕 1회 등 K리그를 대표하는 미드필더였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K리그 통산 득점 35골. 득점왕 경력은 없으며 김주성은 2002 월드컵 이전이었던 1999년에 은퇴했다.)
- Google Bard

20세기를 아시아를 대표했던 '삼손'. 현역 시절 부산 대우 로얄즈에서 활약하며 K리그 최초로 영구 결번(16번)을 부여받은 선수다. 1987년 영플레이어상을 시작으로 공격수(1987년), 미드필더(1991년), 수비수(1996년, 1997년, 1999년) 포지션에서 모두 K리그 베스트 11에 뽑힌 유틸리티 플레이어.
 
선수 생활 초기에는 폭발적인 스피드와 개인기를 바탕으로 윙어에서 드리블을 통해 상대 수비를 제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20대 후반에 들어서는 득점을 노리기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경기를 조율하고 찬스를 만드는 플레이메이커로 스타일을 바꾸었다. 선수 생활 말년에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스위퍼로 포지션을 바꾸었는데 수비력이 좋은 장점을 활용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3개의 포지션에서 탑 플레이어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축구센스, 축구지능, 스피드, 피지컬, 기술, 넓은 시야와 판단력, 수비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선수. 덕분에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1, 일간스포츠 선정 K리그 40주년 베스트 11에도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3위: 황선홍

© 포항 스틸러스
K리그 통산 득점 4위(188골), K리그 MVP 2회, K리그 득점왕 3회 등 최순호와 함께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였습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K리그 통산 64경기 31골. K리그 수상은 1995년 K리그 베스트 11이 끝.)
- Google Bard

199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탁월한 피지컬과 넓은 시야, 활발한 움직임과 뛰어난 위치 선정, 연계 플레이에도 큰 장점을 보인 만능 공격수였다. 다만 황선홍이 쌓은 명성에 비해 K리그 통산 성적만 놓고 보았을 때는 초라하다. 해외 생활이 길었고 부상과 잦은 대표팀 차출이 황선홍이 K리그에서 아쉬운 통산 성적을 남긴 이유다. 선배 최순호와 같은 길을 걸은 셈. 이 때문에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라기보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황선홍은 1990년대 포항 황금기에 한 축을 이루었다. 특히 라데-황선홍 2톱은 가히 위협적. 라데와 황선홍은 16골을 합작했다. 국가대표 차출이 없었던 1995년에는 8경기 연속 골을 포함해 11골 6도움을 기록하며 득점 3위에 올랐고 1997-1998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2연패에 일조했다. 다만 부상이 발목을 잡으며 세레소 오사카 이후 수원, 전남에서는 포항 시절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은퇴한다.

2위: 최순호

© 풋볼리스트
K리그 통산 득점 3위(199골), K리그 MVP 2회, K리그 득점왕 4회 등 이동국과 함께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였습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국의 월드컵 첫 골을 터뜨리며 한국 축구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K리그 통산 100경기 23골 19도움. 득점왕 경력은 없으며 K리그 수상 경력은 K리그 베스트 11이 전부. 월드컵 첫 골은 박창선.)
- Google Bard

대한민국 축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유망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피지컬, 스피드, 제공권, 속도감 있는 드리블, 뛰어난 개인기, 강력한 슈팅, 창조적이고 정확한 패스 1980년 실업팀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해 프로축구가 출범한 1983년부터 1991년까지 포항제철과 럭키금성에서 활약하며 K리그 태동을 함께했다. 다만 최순호는 당시 대표팀에 많이 뽑히며 K리그에서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해 K리그 통산 기록은 실력에 비해 많은 것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대표팀 경기 수(95경기 30골)와 K리그 경기 수(K리그 통산 100경기 23골 19도움)가 비슷한 기형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마저도 실제론 1999년 105경기 출전을 기록하며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으나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일부 경기를 A매치로 인정하지 않아 95경기로 줄어든 것이다. 즉, 원래는 K리그에서 뛴 경기보다 대표팀에서 뛴 경기 수가 더 많은 것.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해 K리그에서 본인의 능력을 많이 펼치지 못한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1984 시즌 리그 24경기 14득점 6도움으로 득점 2위, 공격 포인트 1위를 기록하고 이후 주장을 역임하며 1986년 수퍼리그, 실업축구연맹전 우승과 1985년, 1987년 수퍼리그 준우승에 공헌했다. 포항제철 시절 활약을 바탕으로 1984년 K리그 베스트 11을 차지했고 포항 스틸러스 명예의 전당 K리그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K리그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 6인 중 1세대 선수 부문에 뽑혔다.(실제로 최순호는 선정위, 구단, 미디어, 팬 투표 모두에서 가장 많은 투표를 받았다. 최순호의 합산 득표점수는 30.472점으로, 2위 최강희의 15.165점을 앞섰다.)

1위: 이동국

© 엑스포츠뉴스
K리그 통산 최다 득점(224골) 및 최다 출전(548경기) 기록 보유자입니다. K리그 MVP 3회, K리그 득점왕 5회, AFC 아시안컵 득점왕 1회 등 화려한 개인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기여하며 한국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2002 월드컵 미발탁, 통산 득점 228골. K리그 MVP 4회, K리그 득점왕 1회)
- Google Bard

고종수, 안정환과 함께 1990년대 후반 K리그 트로이카를 이끌었던 주역. K리그 역사상 최초이자 2024년 1월 6일 기준으로 유일한 70-70 클럽에 가입한 선수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데뷔해 2002년까지 맹활약하다 베르더 브레멘, 미들즈브러에서 뛰며 잠시 K리그를 떠났다. 2008년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성남 일화를 거쳐 2009년 전북 현대에 입단해 2020년까지 K리그 우승 8번, FA컵,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전북 현대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선수로 남았다.
 
이동국은 K리그 통산 548경기 228골 77도움을 기록하며 전북 현대 역대 최다 득점자, K리그 역대 최다 득점과 최다 공격포인트, 필드플레이어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해 개인 기록으로도 K리그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한 AFC 챔피언스 리그 MVP와 득점왕(2011년), K리그 MVP 4회(2009년, 2011년, 2014년, 2015년), K리그 신인왕(1998년), K리그 득점왕(2009년), K리그 도움왕(2011년), K리그1 팬타스틱 플레이어(2009년, 2011년, 2012년, 2014년, 2015년), K리그1 베스트 11 (2009년, 2011년, 2012년, 2014년, 2015년)까지 수상하지 못한 K리그 상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많은 개인 수상을 기록했다. 이를 토대로 전북 현대 영구결번과 K리그 4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K리그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 6인 중 4세대 선수 부문에 뽑혔다.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의문점이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K리그 선수 Top 10을 선정해 달라는데 선정 이유에 국가대표 활약상을 넣은 것. 대체 왜 이렇게 선정했는지 궁금하여 Google Bard가 작성한 선정 기준을 가져왔다.

개인 기록: 개인 통산 득점, 출전, MVP, 득점왕, 베스트 11 등
팀 성적: 소속팀 우승, 준우승, 3위 등
국가대표팀 활약: A매치 출전, 득점, 우승, 준우승, 3위 등

 
물론 칼럼에서 활용한 답안은 선정 기준을 설명하지 않아 다른 답안에서 Google Bard가 작성한 선정 기준을 가져왔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칼럼에서 활용한 답안에서도 K리그 선수 Top 10을 선정해 달라는 질문에도 Google Bard는 국가대표 활약을 포함해 평가해 순위를 매겼기 때문이다.

필자는 K리그와 국가대표 업적은 엄연히 다르며, K리그 선수를 평가할 때 국가대표 업적은 배제해서 평가한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과거에 뛰었던 K리그 선수들을 평가할 때 대표팀에서 보여준 임팩트도 포함하여 평가한다. 이 때문에 대표팀에서 많이 뛰지 못한 1980~90년대 K리그 선수들은 저평가받는다. K리그보다 대표팀을 더 중요시했던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비하여 대화형 인공지능이 작성하는 답변 정확도가 높아진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이흥실, 신태용, 박경훈, 샤샤, 라데, 아디 등 과거 K리그를 빛냈던 선수들이 없어 우리들이 완벽히 만족할 답변을 아직까진 내지 못한 점은 아쉽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 인공지능이 지금과는 다르게 정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다음과 같이 수정해 보았습니다'라고 나타나는 이유는 Google Bard가 자꾸 사진을 넣어서 10위를 다 적어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단, 사진은 넣지 않아도 돼'라는 질문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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